비가 내리는데도 우산을 쓰고 산책을 나갔다. 흐린 날씨 탓에 햇빛은 없지만 그래도 밝은 시간에 걷고 싶었기 때문이다. 집 안에서 여기저기 떨어지는 빗소리와 간간히 들려오는 바람소리를 듣는게 제일 좋지만 습기에 젖어 은은하게 풍겨 올라오는 풀냄새와 물에 젖어 한층 선명해진 갖가지 사물들의 색깔을 감상하는 재미도 꽤 쏠쏠하다. 빗물에 퉁퉁 불어버린 양말은 집에 들어와서 후딱 벗어버리면 그만이다.


홍제천 가의 산책로 중에서 연남교에서 한강방향으로 약 1km정도는 도로가 처마처럼 튀어나와 산책로의 지붕역할을 해준다. 그래서 비오는 날에도 우산없이 걸을 수 있다. 그 길을 내 걸음걸이에 집중해서 천천히 걷는다. 뒤꿈치부터 지면에 착지시켜 발바닥 전체로 걷기. 자꾸 바깥쪽으로 돌아가는 오른발을 왼발과 같은 각으로 유지하면서 걷기. 척추와 고관절이 뒤틀렸기 때문에 교정차원에서 이렇게 한다. 


한참 걷고 있는데 뒤쪽에서 바구니 달린 자전거가 스윽 추월한다. 중년 아주머니였는데 바구니에는 까만 비닐봉지를 바람막이처럼 둘러쓴 강아지 한마리를 태우고 있었다. 갈색털이 곱슬곱슬 했는데 종자는 모르겠다. 아주 얌전했다. 우리 나니도 다른 사람 눈에 저렇게 얌전해 보일 때가 있을까. 비만 오지 않았어도 나니를 산책 시켰을 텐데 하면서 계속 앞으로 걸었다. 홍제천의 수위는 꽤 높아져서 어떤 지점에서는 산책로 높이에 육박하게 올라와 있었고 내부순환로 고가도로의 배수관에서 새어나오는 폭포수같은 물줄기가 이상한 무늬를 만들며 홍제천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지붕이 있는 산책로의 끝지점에 다다랐을때 물가에 걸터앉은 아주머니를 발견했다. 옆에 바구니 자전거가 세워져 있었고 아까 바람막이처럼 쓰고 있던 까만 비닐을 돗자리처럼 깔고 앉은 갈색 털 강아지가 바짝 붙어 있었다. 아주머니는 흔히 군모라고 부르는 챙이 짧은 모자를 쓰고 있었다. 그리고 손에는 통장을 펼쳐들고 그 안을 지긋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통장의 숫자들은 알아볼 수 없었다. 몇 걸음 후에 다시 돌아봤을 때는 통장을 접고 강아지를 쓰다듬고 있었다. 


이 장면이 이상하게 마음 속을 파고 들어왔다. 그녀의 행동에서 유추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다 슬픔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그 통장에 찍혀있던 숫자들이 출금 아닌 입금된 내역이기를, 곱슬머리 강아지가 그녀 곁에서 오래오래 좋은 친구가 되기를 기도한다. 부엌 창 너머의 빗소리가 점점 더 거세지기만 한다. 빨리 비가 그쳐야 빨래를 할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