래리의 인생이 갑자기 곤두박질친다. 대학에서 물리학을 가르치는 래리에게 싸우스 코리아 학생이 성적을 고쳐달라며 돈봉투를 놓고 간다. 옆집의 터프가이는 무턱대고 마당경계를 넘어서 보트창고를 짓겠다고 한다. 아내는 래리의 친구 싸이와 결혼하겠다며 이혼을 독촉한다. 대학의 종신 재직권 심사가 코앞인데 심사위에 래리를 험담하는 익명의 편지가 투고된다. 유대교 성인식을 앞둔 아들은 마리화나를 사기 위해 누나의 돈을 훔치지만 누나 역시 래리의 지갑에서 슬쩍한 돈이다. 모든 것이 평온하게만 여겨지던 래리에게 이 모든 일들이 갑자기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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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영화에 어울릴 법한 아이디어에서 잉태된 영화다. 허무하다는 평들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영화에서 보여주는 공간도 얼마되지 않고 외계인 표현도 매우 절제돼 있다. 게다가 배우도 많이 안 나오고 그런 상황에서 꽤 비중있는 단역으로 감독 자신이 나온 것을 생각하면 상당히 가벼운 마음으로 만든 저예산 소품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하지만 IMDB 를 뒤져보니 추정예산이  $72,000,000 (estimated) 이나 된다 !! 다음 작품이었던 빌리지(2004)는 $60,000,000 (estimated), 전작이었던 언브레이커블(2000) $75,000,000 (estimated), 식스센스(1999)는 $40,000,000 (estimated) 였다. 2000년대 초반 헐리우드 평균 제작비가 7000만달러 정도라니 딱 평균 제작비가 들어간 영화다. 그 돈 다 어디에 쓴 거지?

그렇다고 영화가 막 구리지는 않다. 로우앵글로 화면 가까이(속칭: 대마이)의 무언가를 향해 시선을 주거나 조심스레 다가오는 인물들을 보여주는 방식을 반복적으로 사용함으로써 미지의 대상을 향한 궁금증과 긴장감을 자아내는 방식도 멋지진 않지만 충분히 납득가능하다. 딸 아이의 오염된 물에 대한 강박도 자연스럽게 영화 전체에 기여하는 방향으로 녹여낸 것도 칭찬하고 싶다. 하지만 죽기 직전 아내의 의미를 알 수 없는 헛소리가 훗날 닥칠 위기의 상황을 타개할 신탁처럼 작용한다는 이야기는 확실히 관객을 허무한 기분에 휩싸이게 한다. 게다가 그게 '야구빠따를 휘둘러라'라니!

리뷰를 쓰다보니 보고 난 직후보다 더 별로인 영화라는 감상이 진해진다. 확실히 영화에 어울리는 이야기 더 적합한 이야기라는 게 존재하는 것 같다.


스타일은 느와르의 전형에서 벗어나 있지만 

이야기 구조는 거의 완벽한 느와르.

과거 느와르의 주인공들이 형사나 보험회사 직원이었다면

여기는 정신과의사라는 것이 참신한 점.

정신과 의사인 뱅크에게 진료를 받던 

에밀리가 우울증 치료제의 부작용으로 몽유병 상태에서 남편을 살해하고 기소된다. 

이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뱅크의 삶에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하고

이를 복구하기 위해 사건에 매달릴수록 더 나락으로 떨어지고 만다.


뱅크의 삶을 무너뜨린 사건의 진실에 좀 더 호소력이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든다.

잭 니콜슨이 출연했던 차이나타운은 관객 입장에서 사건의 실체를 알게 됐을 때

거대한 소용돌이에 인물들이 휩쓸려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임팩트가 있었다.

그만큼 그 사건의 실체가 비극적이고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는데 비해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사건의 실체란 것이 허탈하고 무기력해 보인다.


그럼에도 간단한 소품이나 주변 인물의 시선컷 등을 적재적소에 활용해

간결하고 효율적으로 진행되는 연출은 일품.

자연스레 메모해놓고 써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체제와 개인의 행복, 이 둘은 어떤 관계 속에 놓여있는가.


가장 인상적인 두 개의 에피소드. 


1. 

마을을 도적떼로부터 보호할 목적으로 모집된 사무라이들이 마을에 도착했는데 아무도 반기지 않는다. 인사는 커녕 모두 집에 숨어 코빼기도 비치지 않는다. 사무라이들이 마을 여자들을 범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뜻밖의 박대에 사무라이들은 언짢고 당황스럽다. 그도 그럴 것이 이들은 목숨을 거는데 대한 정당한 보수도 받지 못하고 오직 농민들의 비참한 삶에 대한 동정과 의로운 마음으로 참전을 결정했기 때문이다촌장이 두려움이 많을 수 밖에 없는 농민들의 삶을 얘기하면서 양해를 구하고 사과하지만 마을 사람들의 두려움을 어떻게 해소시켜야 하는지는 누구도 알지 못한.


2. 

전쟁을 대비한 본격적인 훈련에 돌입하면서 마을에 숨겨져 있던 갑옷과 무기가 무더기로 발견된다. 사무라이들은 진노한다. 농민들이 패잔병들을 습격하여 그들을 죽이고 빼앗은 전리품인 걸 알았기 때문이다. 사무라이 사냥을 한 농민들에 대한 분노로 사무라이들은 과연 이 마을을 도와야 하는가를 되묻게 된다


3. 

두 사건은 공히 키쿠지요라는 디오니소스적인 인물에 의해 해결된다. 키쿠지요는 사무라이 행세를 하며 다니지만 실은 어디선가 얻은 사무라이 가문의 족보와 검을 들고 다닐뿐 사무라이가 아니다. 키쿠지요라는 이름도 들고 다니던 족보에서 얻은 이름이고 본명도 모르는 천애고아다. 덥수룩한 수염과 강한 인상이 산적을 연상시키는 이 남자는 감정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생각보단 행동이 앞서는 타입이다. 


첫번째 사건에서 그는 도적이 침입할때 울리는 경보를 울려 혼비백산한 마을 주민들이 사무라이들에게 자발적으로 달려오게 만들어 갈등을 해소시킨다. 두번째 사건에서는 화가 난 사무라이들 앞에서 광기어린 열변을 토한다. 이 농민들은 비열하고 역겨운 살인자들이다. 하지만 이들을 이렇게 만든 건 너희 사무라이들의 수탈과 압제 때문이라고 외치면서 울분에 휩싸여 오열한다. 영화에서 키쿠지요는 두 번 오열하는데 한 번은 바로 이 열변을 토한 직후이고 두번째는 도적떼와의 전투에서 부모가 모두 죽은 어린 아이를 품에 안았을 때. 그 아이와 자신의 삶이 꼭 같았기 때문이다. 사무라이들은 키쿠지요의 열변에 다시 마음을 돌린다.


농민의 자식으로 태어나 사무라이가 됐(?)기 때문에 키쿠지요가 사무라이들과 농민들의 중재자 역할을 하는 것이 매우 설득력 있게 느껴진다. 망나니 같은 캐릭터 탓에 옳은 말을 열변을 토하며 해도 오글거리지 않는 장점도 있다.  








역시나 고요, 침묵의 세계. 멜빌의 인물들은 헬기를 이용해 기차에 잠입하는 고난도 액션을 하면서도 말 한마디 하지 않는다. 이들은 마치 범행을 저지르거나 임무를 수행하면서 한 마디라도 말을 하면 모든 일이 어그러진다는 신탁이라도 받은 것 같다. 첫 씬과 마지막씬의 거리도 이상하리만치 사람이 없고 황량해 잘못 계획한 한국의 신도시 풍경을 연상시킨다. 멜빌은 침묵 속에서 피어나는 긴장감의 힘을 가장 잘 이해하는 감독이다. 누차 언급하지만 영화에 사운드가 도입되면서 얻은 전리품이 바로 '침묵'이다. 멜빌은 이 침묵, 즉 다이얼로그가 소거된 사운드와 시선의 교차를 끈질기게 직조하여 독보적인 긴장감을 만들어낸다. 이것은 혼이 나갈듯하게 몰아치는 빵빵한 사운드와 눈 깜짝할 새 지나가는 빠른 화면으로 만들어내는 스릴과는 전혀 다르다. 멜빌의 세계를 들여다보고 있자면 종종 숨이 막혀 의식적으로 호흡을 가다듬어야 할 때가 있는데 이 영화의 긴장감 역시 바로 이런 류의 숨막힘에 가깝다. 


헬기에서 기차로 잠입하는 시퀀스는 아주 인상적인데 아쉬운 점은 당시 기술력과 자본의 한계 탓인지 너무 조악한 미니어처로 제작돼 몰입하기가 쉽지 않았다. 구스 반 산트가 싸이코를 리메이크 한 것처럼 누가 이 시퀀스만 원작하고 똑같이 실물 기차와 헬기를 동원해 리메이크 했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지금 얘기한 기차 씬에서 시몽이 잠입해서 옷갈아 입고 신발 벗고 하는 행동 하나하나를 디테일하게 다 보여준다. 뭐 하는지 알았으니까 그만! 됐다고! 하는 마음이 드는데도 아직 시몽은 다른쪽 신발 끈을 풀고 있다. 요즘 같으면 피디한테 혼나고 편집자한테 잔소리 들었을 그런 리듬. 물론 나는 영화에서 비효율적으로 시시콜콜하게 많이 보여주는 걸 좋아하는 취향이라 싫지는 않았다. 나는 그런 쓸데없는 컷들에서 영화의 리얼리티가 획득되는 경험을 많이 해서. 멜빌의 경우에는 그런 부분이 전체 리듬에 기여하는 바도 상당하고. 재밌는 것은 어디 블로그에서 본 리뷰에는 많이 보여주지 않아서 불친절하다고 돼있던데 내가 보기엔 너무 많이 보여줘서 불편한 느낌이 드는 거라고 생각한다.


주인공이 주로 범죄자인 경우가 많았던 거 같은데 알랑드롱이 형사로 나온다. 하지만 범죄자 못지않다. 뜨거운 더티 해리와는 다르게 아주 창백하게 못됐다. 범인이고 끄나풀이고 수틀리면 여지없이 귓방망이를 올려 붙인다. 근데 덩치 큰 용의자는 안 때리고 담뱃불 붙여준다. 나는 이게 좀 웃겼는데 앞에서 계속 때려 놓은게 있어서 때리겠지 때리겠지 하고 있는데 앵글이 의도적으로 굉장히 둘의 키 차이를 강조해서 보여준다. 알랑들롱이 엄청 올려보는 상황. 근데 표정, 눈빛은 살아있지. 용의자도 처음엔 당당하다가 그 기세에 눌려 약간 쪼는 순간에 알랑들롱이 담배를 척 꺼내 불을 붙여준다. 또 알랑드롱이 범인의 여자와 몰래 사랑하던 사이였는데 마지막에 범인을 검거하는데 여자를 이용하고는 냉정하게 떠나버린다. 근데 너무 잘생겨서 악한 게 멜랑꼴리해 보이는 효과가 있음. 순찰차 인터폰으로 오는 전화를 조수가 받아서 건네면 알랑드롱이 "응? 거기가 어디지? 가고 있어. 다시 전화할게."라고 대답하는 상황이 반복적으로 나온다. 그런데 마지막 씬에서 전화가 계속 오는데 알랑드롱이 범인 죽이고 여자 내버려두고 온 뒤라 기분이 개차반인 걸 눈치채고 아예 전화를 안 받는다. 그렇게 울려대는 전화기 소리와 멍하니 운전하는 알랑들롱의 마지막 얼굴 클로즈업은 꽤 삼삼한 감흥을 주는 구성이었다. 분명 얼굴 클로즈업 만으로는 부족했을터.


개인적으로는 답보상태에 있던 문제의 힌트를 발견할 수 있어서 유레카!였고 앞에 보면서는 다른 멜빌의 영화들에 비해 좀 약하다는 느낌이었는데 마지막 시퀀스 보면서 생각이 바뀜. 기대 안하고 있다가 뒤에서 임팩트 주니까 더 좋아보인다.













두 사람은 좋아하는 데 못 만난다. 무인도에서 4년을 표류한 이 남자는 오직 이 여자만 생각하면서 살아남았고 엉성한 뗏목에 몸을 싣고 목숨을 건 귀환에 성공했다. 하지만 사랑이 이루어지는 데는 그것을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뭘 걸었는지는 결과에 별 영향을 안 끼친다. 현재의 삶을 모조리 무너뜨려야 이루어질 수 있는 사랑이라면 더욱 그렇다. 12년전에 봤을 때는 윌슨 말고는 아무 감흥도 없었는데 지금은 저 짜증나는 상황이 특히 부각돼보였다. 여전히 좋은 영화란 생각은 안 든다. 서로가 좋아하는데 그 감정을 죽이는 일은 하나의 생명체를 살해하는 것 마냥 잔인하고 끔직하게 여겨진다. 그렇게 뜨거운 피가 불끈거리는 생명력 넘치는 감정을 어떻게 죽이는가. 그걸 죽이고 자기도 죽는 건가. 당연히 삶은 계속 되겠지만 그 순간의 자기는 거기다 죽이고 가는 것 같다. 내 시체가 쌓이고 쌓이면 그게 추억이 되는 건가. 난 그냥 활활 타고 싶다. 







두 가지 이야기가 있다. 하나는 '놀라운 이야기', 다른 하나는 '끔찍한 이야기'. 어떤 이들은 두 가지 이야기 모두 진실일 수 있다고 말하는데 내게는 너무나 명확하게 하나의 이야기가 진실이며 다른 하나는 진실을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한 구급약처럼 여겨진다. 글쎄 내가 너무 차갑고 딱딱한 사람이어서일까. 작품에서 얘기하듯이 정말로 이것이 믿음의 문제라면 누군가를 설득하거나 이유를 분석할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다만 나는 '놀라운 이야기'가 진실이라면 굳이 '끔찍한 이야기'를 추가해서 둘 중 어느 것이 진실이냐고 물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끔찍한 이야기'가 그토록 가슴을 후벼파듯 끔찍할 수 있는 것도 시종 진실이라고 여겼던 이야기가 실은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겪은 파이의 생존책이었음이 드러남으로 배가 되기 때문이다. '놀라운 이야기'의 속성들이 '끔찍한 이야기'와 데칼코마니처럼 정확히 겹쳐질때 두 이야기 사이에서는 핏빛 물감이 흘러내렸다. 


때문에 내가 소설에서 주목한 장면은 구명보트 위에서 벌어진 동물들간의 생존투쟁이었다. 결국 이 장면이 '끔찍한 이야기'에서 인간들 사이에 벌어진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 파이이야기 플롯의 야망이 드러나는 지점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당연히 영화에서 과연 이 지점을 어떻게 제시할 것인가가 나의 영화 관람의 포인트였다. 결과는 조금 실망스러웠는데 그것이 곧 영화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영화가 내 예상과는 다른 방향으로 작품을 풀어냈기 때문이다. 


영화는 의도적으로 파이와 리차드 파커와의 관계에만 집중한다. 그것이 CG 구현의 기술적 문제 탓이었을 수도 있다. 좁은 보트 안에서 호랑이, 오랑우탄, 하이에나, 얼룩말을 모두 등장시키며 길게 이야기를 끌고 가는 것이 쉽지 않았음은 분명하다. 영화는 파이의 방주-구명보트에 등장동물들이 모두 승선하자 지체없이 파이와 파커를 제외한 나머지들을 제거한다. 그리고 런닝타임의 대부분을 파이와 리차드 파커의 대립과 공존을 위한 노력, 생존에의 모험에 할애한다. 이렇게 되면 후에 선박회사 직원들과의 대화에서 진실된 '끔찍한 이야기'가 공개될 때의 임팩트가 약해질 수밖에 없다. 또 '끔찍한 이야기'가 오로지 대사만으로 제시되고 있다는 점도 아쉽다. 영화작법에선 통상적으로 관객에게 장면으로 보여주지 않으면 그것은 관객에겐 존재하지 않는 것과 다름없다라고 한다. 대사로만 정보를 제공하는 것은 그 정보를 믿게 하기가 대단히 어려운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반전의 포인트를 약화시켜가면서 영화가 얻어낸 것은 무엇인가. 바로 쓰리디 효과. 나는 영화가 소설 내러티브의 핵심 장점을 의도적으로 분쇄하여 최상의 쓰리디 효과를 낼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다고 생각한다. 보트 위 육상동물들의 움직임과 재현에는 품이 많이 드는 것에 비해 효용이 낮다. 바닷 속 동물들의 움직임은 바닷물이라는 저항이 거센 매질 속에서 이뤄지기 때문에 부유하는 느낌, 공기방울 효과 등 쓰리디 효과를 주었을 때 보다 화려하게 보일 수 있는 요소가 많다. 보트 위에 발이 묶여있는 주요인물들의 정적인 동선에 비해 물속 생명체들은 관객의 코앞까지 왔다갔다하면서 자유롭고 속도감 있는 움직임을 구현할 수 있다. 또 빛과 바닷물을 이용해 환상적인 풍경을 구성하고 제시하는 작업은 작업자들 스스로도 한편의 명화를 만드는 듯한 즐거움을 느꼈을 것이라 확신이 들만큼 아름다웠다. 


결과적으로 나는 영화가 소설에 최소한의 예의를 갖출만큼의 내러티브만 유지하면서 아름답고 효과적인 쓰리디 효과를 극대화하는 선택을 했으며 그것이 꽤 주요해 가장 성공적인 쓰리디 영화가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 덧붙여 이 영화가 정말 믿음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면 그것은 오히려 두 이야기 중 어느 것을 선택하느냐 혹은 신의 존재에 대한 물음이라기보다는 세상 어딘가에 우리가 아직 맞닥뜨려본 적 없는 마법같은 풍경과 장면들이 존재한다는 믿음에 더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것이 의심할 바없이 영화라는 매체가 우리에게 선사하는 가장 큰 선물 중 하나라고 확신한다. 



웨이랜드 회장은 왜 자신의 탐사합류 사실을 속여야 했을까? 왜 웨이랜드 회장은 혹은 데이빗은 박사커플을 살해하려 했을까? 또 그래놓고 최후의 엔지니어를 만나러 갈때는 왜 여자박사를 데려갔는가? 캡틴과 부조종사들은 어찌그리 쉽게 자기 목숨을 희생할 수 있었을까? 이렇게 여러군데 이빨이 빠져있어 어떡!하지~납득이 안된다.

하지만 로봇 데이빗이 인간들과 대화할때 고분고분 한 듯 하면서도 틱틱거리고 사람 머리 꼭대기 위에서 쥐락펴락 뼈있는 말ㄹ

iPhone 에서 작성된 글입니다.



교과서에 시가 실리는 노작가가 열일곱 소녀를 사랑하게 된다. 그는 그녀를 사모하는 마음을 담아 소설을 한편 썼는데 <은교>라고, 그것은 그녀의 이름이다. 비록 육신은 주름지고 검버섯이 피었지만 욕망에는 나이가 없는지라 노작가는 소설 속에서라도 마음껏 그녀를 사랑한다. 하지만 이 늙은 작가의 주책맞은 소설은 어두운 서랍속에 봉인된채 누구에게도 읽혀지지 않는다. 은교를 향한 노작가의 욕망처럼.   


이 작가에게는 젊고 잘생긴 제자가 있는데 이제 막 발표한 소설이 베스트셀러가 됐다. 이곳저곳에서 사인회를 열고 여성팬들과 짐짓 쑥쓰러운척 포옹을 하거나 사진을 찍는다. 그는 자기 글을 한 쪽도 제대로 쓰지 못할때도 스승의 집에 하인처럼 들락거리며 밥상을 차리고 빨래를 하고 또 그의 바깥일을 돕고 수행한다. 그러다 서랍 속 <은교>를 보게된다. 눈이 뒤집힌다.


제자는 사실 소녀 은교를 질투하고 있었다. 그는 은교를 향한 스승의 마음을 알고 있었고 조바심이 났다. 갖은 수발을 들면서 아둥바둥 매달려 있는 자신의 입장에선 존재 자체로 사랑받는 은교가 죽일 듯이 미웠다. 남자인 그가 스승을 사랑했냐고. 어쩌면. 그도 스승을 간절히 욕망했다. 사실 그의 베스트셀러 소설은 스승인 노작가가 옛다 먹고 떨어져라며 써준 소설이었다. 그의 꿈인 소설가가 될 수 있게 해준 사람. 그 사람이 없으면 나의 꿈 소설가도 없다. 이 욕망이 사랑이 아니면 무어냐.


<은교>를 훔친 제자는 소설을 자기 이름으로 발표한다. 보는 눈이 없어 대단한 소설을 알아보지 못했던가. 생각치도 않게 소설은 호평일색. 소설 <은교>의 발표는 결국 문단의 입소문을 타고 노작가의 귀에 들어간다. 스승은 대노하여 제자의 멱살을 잡고 불호령을 내리지만 이미 스승의 소설로 작가 타이틀을 단 제자는 부끄러움을 모른다. 그 뻔뻔함의 제공자인 스승이 무슨 할 말이 있겠냐만은 아마 그에겐 제자가 소설을 훔친 것보다는 은교를 욕망하는 자기 마음이 까발려져 그녀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더 큰 분노를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소녀 은교도 소설 <은교>의 존재를 알게 되지만 노작가의 일방적인 관계 단절의 이유는 알지 못한다. 그녀에게 자기 이름이 붙은 소설의 작가는 노작가가 아니라 그의 제자다. 그 사이 소설 <은교>는 이상문학상을 수상하고 스승은 수상식 자리에 참석해 제자의, 아니 자기 소설에 대한 평을 밝힌다. 공개적으로 소설 <은교>를 제자의 것으로 인정한 것이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노작가의 생일날. 은교, 제자가 스승의 집에 함께 모인다. 그날 밤 스승은 자신이 잠든 새, 은교와 제자가 함께 뒹구는 것을 발견한다. 젊고 젊은 육체가 뒤엉켜 있는 것을 오래도록 바라본다. 


노작가는 소설 <은교>를 빼앗겼을 때는 선선히 내줬지만, 소녀 은교를 빼앗기고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제자를 위험에 빠뜨릴 함정을 준비한다. 그 함정은 언뜻 실패하는 듯 했으나 종국에는 원하던 결과를 이루어 제자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 노작가는 은교에게 자신이 제자를 죽였노라 메시지를 보낸다. 은교는 소설 <은교>의 작가가 노작가였음을 깨닫고 그를 찾아와 자신의 깨달음과 어리석음을 고백한다. 노작가는 그렇게 은교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