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일은 느와르의 전형에서 벗어나 있지만 

이야기 구조는 거의 완벽한 느와르.

과거 느와르의 주인공들이 형사나 보험회사 직원이었다면

여기는 정신과의사라는 것이 참신한 점.

정신과 의사인 뱅크에게 진료를 받던 

에밀리가 우울증 치료제의 부작용으로 몽유병 상태에서 남편을 살해하고 기소된다. 

이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뱅크의 삶에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하고

이를 복구하기 위해 사건에 매달릴수록 더 나락으로 떨어지고 만다.


뱅크의 삶을 무너뜨린 사건의 진실에 좀 더 호소력이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든다.

잭 니콜슨이 출연했던 차이나타운은 관객 입장에서 사건의 실체를 알게 됐을 때

거대한 소용돌이에 인물들이 휩쓸려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임팩트가 있었다.

그만큼 그 사건의 실체가 비극적이고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는데 비해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사건의 실체란 것이 허탈하고 무기력해 보인다.


그럼에도 간단한 소품이나 주변 인물의 시선컷 등을 적재적소에 활용해

간결하고 효율적으로 진행되는 연출은 일품.

자연스레 메모해놓고 써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체제와 개인의 행복, 이 둘은 어떤 관계 속에 놓여있는가.


가장 인상적인 두 개의 에피소드. 


1. 

마을을 도적떼로부터 보호할 목적으로 모집된 사무라이들이 마을에 도착했는데 아무도 반기지 않는다. 인사는 커녕 모두 집에 숨어 코빼기도 비치지 않는다. 사무라이들이 마을 여자들을 범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뜻밖의 박대에 사무라이들은 언짢고 당황스럽다. 그도 그럴 것이 이들은 목숨을 거는데 대한 정당한 보수도 받지 못하고 오직 농민들의 비참한 삶에 대한 동정과 의로운 마음으로 참전을 결정했기 때문이다촌장이 두려움이 많을 수 밖에 없는 농민들의 삶을 얘기하면서 양해를 구하고 사과하지만 마을 사람들의 두려움을 어떻게 해소시켜야 하는지는 누구도 알지 못한.


2. 

전쟁을 대비한 본격적인 훈련에 돌입하면서 마을에 숨겨져 있던 갑옷과 무기가 무더기로 발견된다. 사무라이들은 진노한다. 농민들이 패잔병들을 습격하여 그들을 죽이고 빼앗은 전리품인 걸 알았기 때문이다. 사무라이 사냥을 한 농민들에 대한 분노로 사무라이들은 과연 이 마을을 도와야 하는가를 되묻게 된다


3. 

두 사건은 공히 키쿠지요라는 디오니소스적인 인물에 의해 해결된다. 키쿠지요는 사무라이 행세를 하며 다니지만 실은 어디선가 얻은 사무라이 가문의 족보와 검을 들고 다닐뿐 사무라이가 아니다. 키쿠지요라는 이름도 들고 다니던 족보에서 얻은 이름이고 본명도 모르는 천애고아다. 덥수룩한 수염과 강한 인상이 산적을 연상시키는 이 남자는 감정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생각보단 행동이 앞서는 타입이다. 


첫번째 사건에서 그는 도적이 침입할때 울리는 경보를 울려 혼비백산한 마을 주민들이 사무라이들에게 자발적으로 달려오게 만들어 갈등을 해소시킨다. 두번째 사건에서는 화가 난 사무라이들 앞에서 광기어린 열변을 토한다. 이 농민들은 비열하고 역겨운 살인자들이다. 하지만 이들을 이렇게 만든 건 너희 사무라이들의 수탈과 압제 때문이라고 외치면서 울분에 휩싸여 오열한다. 영화에서 키쿠지요는 두 번 오열하는데 한 번은 바로 이 열변을 토한 직후이고 두번째는 도적떼와의 전투에서 부모가 모두 죽은 어린 아이를 품에 안았을 때. 그 아이와 자신의 삶이 꼭 같았기 때문이다. 사무라이들은 키쿠지요의 열변에 다시 마음을 돌린다.


농민의 자식으로 태어나 사무라이가 됐(?)기 때문에 키쿠지요가 사무라이들과 농민들의 중재자 역할을 하는 것이 매우 설득력 있게 느껴진다. 망나니 같은 캐릭터 탓에 옳은 말을 열변을 토하며 해도 오글거리지 않는 장점도 있다.  








역시나 고요, 침묵의 세계. 멜빌의 인물들은 헬기를 이용해 기차에 잠입하는 고난도 액션을 하면서도 말 한마디 하지 않는다. 이들은 마치 범행을 저지르거나 임무를 수행하면서 한 마디라도 말을 하면 모든 일이 어그러진다는 신탁이라도 받은 것 같다. 첫 씬과 마지막씬의 거리도 이상하리만치 사람이 없고 황량해 잘못 계획한 한국의 신도시 풍경을 연상시킨다. 멜빌은 침묵 속에서 피어나는 긴장감의 힘을 가장 잘 이해하는 감독이다. 누차 언급하지만 영화에 사운드가 도입되면서 얻은 전리품이 바로 '침묵'이다. 멜빌은 이 침묵, 즉 다이얼로그가 소거된 사운드와 시선의 교차를 끈질기게 직조하여 독보적인 긴장감을 만들어낸다. 이것은 혼이 나갈듯하게 몰아치는 빵빵한 사운드와 눈 깜짝할 새 지나가는 빠른 화면으로 만들어내는 스릴과는 전혀 다르다. 멜빌의 세계를 들여다보고 있자면 종종 숨이 막혀 의식적으로 호흡을 가다듬어야 할 때가 있는데 이 영화의 긴장감 역시 바로 이런 류의 숨막힘에 가깝다. 


헬기에서 기차로 잠입하는 시퀀스는 아주 인상적인데 아쉬운 점은 당시 기술력과 자본의 한계 탓인지 너무 조악한 미니어처로 제작돼 몰입하기가 쉽지 않았다. 구스 반 산트가 싸이코를 리메이크 한 것처럼 누가 이 시퀀스만 원작하고 똑같이 실물 기차와 헬기를 동원해 리메이크 했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지금 얘기한 기차 씬에서 시몽이 잠입해서 옷갈아 입고 신발 벗고 하는 행동 하나하나를 디테일하게 다 보여준다. 뭐 하는지 알았으니까 그만! 됐다고! 하는 마음이 드는데도 아직 시몽은 다른쪽 신발 끈을 풀고 있다. 요즘 같으면 피디한테 혼나고 편집자한테 잔소리 들었을 그런 리듬. 물론 나는 영화에서 비효율적으로 시시콜콜하게 많이 보여주는 걸 좋아하는 취향이라 싫지는 않았다. 나는 그런 쓸데없는 컷들에서 영화의 리얼리티가 획득되는 경험을 많이 해서. 멜빌의 경우에는 그런 부분이 전체 리듬에 기여하는 바도 상당하고. 재밌는 것은 어디 블로그에서 본 리뷰에는 많이 보여주지 않아서 불친절하다고 돼있던데 내가 보기엔 너무 많이 보여줘서 불편한 느낌이 드는 거라고 생각한다.


주인공이 주로 범죄자인 경우가 많았던 거 같은데 알랑드롱이 형사로 나온다. 하지만 범죄자 못지않다. 뜨거운 더티 해리와는 다르게 아주 창백하게 못됐다. 범인이고 끄나풀이고 수틀리면 여지없이 귓방망이를 올려 붙인다. 근데 덩치 큰 용의자는 안 때리고 담뱃불 붙여준다. 나는 이게 좀 웃겼는데 앞에서 계속 때려 놓은게 있어서 때리겠지 때리겠지 하고 있는데 앵글이 의도적으로 굉장히 둘의 키 차이를 강조해서 보여준다. 알랑들롱이 엄청 올려보는 상황. 근데 표정, 눈빛은 살아있지. 용의자도 처음엔 당당하다가 그 기세에 눌려 약간 쪼는 순간에 알랑들롱이 담배를 척 꺼내 불을 붙여준다. 또 알랑드롱이 범인의 여자와 몰래 사랑하던 사이였는데 마지막에 범인을 검거하는데 여자를 이용하고는 냉정하게 떠나버린다. 근데 너무 잘생겨서 악한 게 멜랑꼴리해 보이는 효과가 있음. 순찰차 인터폰으로 오는 전화를 조수가 받아서 건네면 알랑드롱이 "응? 거기가 어디지? 가고 있어. 다시 전화할게."라고 대답하는 상황이 반복적으로 나온다. 그런데 마지막 씬에서 전화가 계속 오는데 알랑드롱이 범인 죽이고 여자 내버려두고 온 뒤라 기분이 개차반인 걸 눈치채고 아예 전화를 안 받는다. 그렇게 울려대는 전화기 소리와 멍하니 운전하는 알랑들롱의 마지막 얼굴 클로즈업은 꽤 삼삼한 감흥을 주는 구성이었다. 분명 얼굴 클로즈업 만으로는 부족했을터.


개인적으로는 답보상태에 있던 문제의 힌트를 발견할 수 있어서 유레카!였고 앞에 보면서는 다른 멜빌의 영화들에 비해 좀 약하다는 느낌이었는데 마지막 시퀀스 보면서 생각이 바뀜. 기대 안하고 있다가 뒤에서 임팩트 주니까 더 좋아보인다.













두 사람은 좋아하는 데 못 만난다. 무인도에서 4년을 표류한 이 남자는 오직 이 여자만 생각하면서 살아남았고 엉성한 뗏목에 몸을 싣고 목숨을 건 귀환에 성공했다. 하지만 사랑이 이루어지는 데는 그것을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뭘 걸었는지는 결과에 별 영향을 안 끼친다. 현재의 삶을 모조리 무너뜨려야 이루어질 수 있는 사랑이라면 더욱 그렇다. 12년전에 봤을 때는 윌슨 말고는 아무 감흥도 없었는데 지금은 저 짜증나는 상황이 특히 부각돼보였다. 여전히 좋은 영화란 생각은 안 든다. 서로가 좋아하는데 그 감정을 죽이는 일은 하나의 생명체를 살해하는 것 마냥 잔인하고 끔직하게 여겨진다. 그렇게 뜨거운 피가 불끈거리는 생명력 넘치는 감정을 어떻게 죽이는가. 그걸 죽이고 자기도 죽는 건가. 당연히 삶은 계속 되겠지만 그 순간의 자기는 거기다 죽이고 가는 것 같다. 내 시체가 쌓이고 쌓이면 그게 추억이 되는 건가. 난 그냥 활활 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