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가지 이야기가 있다. 하나는 '놀라운 이야기', 다른 하나는 '끔찍한 이야기'. 어떤 이들은 두 가지 이야기 모두 진실일 수 있다고 말하는데 내게는 너무나 명확하게 하나의 이야기가 진실이며 다른 하나는 진실을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한 구급약처럼 여겨진다. 글쎄 내가 너무 차갑고 딱딱한 사람이어서일까. 작품에서 얘기하듯이 정말로 이것이 믿음의 문제라면 누군가를 설득하거나 이유를 분석할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다만 나는 '놀라운 이야기'가 진실이라면 굳이 '끔찍한 이야기'를 추가해서 둘 중 어느 것이 진실이냐고 물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끔찍한 이야기'가 그토록 가슴을 후벼파듯 끔찍할 수 있는 것도 시종 진실이라고 여겼던 이야기가 실은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겪은 파이의 생존책이었음이 드러남으로 배가 되기 때문이다. '놀라운 이야기'의 속성들이 '끔찍한 이야기'와 데칼코마니처럼 정확히 겹쳐질때 두 이야기 사이에서는 핏빛 물감이 흘러내렸다. 


때문에 내가 소설에서 주목한 장면은 구명보트 위에서 벌어진 동물들간의 생존투쟁이었다. 결국 이 장면이 '끔찍한 이야기'에서 인간들 사이에 벌어진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 파이이야기 플롯의 야망이 드러나는 지점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당연히 영화에서 과연 이 지점을 어떻게 제시할 것인가가 나의 영화 관람의 포인트였다. 결과는 조금 실망스러웠는데 그것이 곧 영화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영화가 내 예상과는 다른 방향으로 작품을 풀어냈기 때문이다. 


영화는 의도적으로 파이와 리차드 파커와의 관계에만 집중한다. 그것이 CG 구현의 기술적 문제 탓이었을 수도 있다. 좁은 보트 안에서 호랑이, 오랑우탄, 하이에나, 얼룩말을 모두 등장시키며 길게 이야기를 끌고 가는 것이 쉽지 않았음은 분명하다. 영화는 파이의 방주-구명보트에 등장동물들이 모두 승선하자 지체없이 파이와 파커를 제외한 나머지들을 제거한다. 그리고 런닝타임의 대부분을 파이와 리차드 파커의 대립과 공존을 위한 노력, 생존에의 모험에 할애한다. 이렇게 되면 후에 선박회사 직원들과의 대화에서 진실된 '끔찍한 이야기'가 공개될 때의 임팩트가 약해질 수밖에 없다. 또 '끔찍한 이야기'가 오로지 대사만으로 제시되고 있다는 점도 아쉽다. 영화작법에선 통상적으로 관객에게 장면으로 보여주지 않으면 그것은 관객에겐 존재하지 않는 것과 다름없다라고 한다. 대사로만 정보를 제공하는 것은 그 정보를 믿게 하기가 대단히 어려운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반전의 포인트를 약화시켜가면서 영화가 얻어낸 것은 무엇인가. 바로 쓰리디 효과. 나는 영화가 소설 내러티브의 핵심 장점을 의도적으로 분쇄하여 최상의 쓰리디 효과를 낼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다고 생각한다. 보트 위 육상동물들의 움직임과 재현에는 품이 많이 드는 것에 비해 효용이 낮다. 바닷 속 동물들의 움직임은 바닷물이라는 저항이 거센 매질 속에서 이뤄지기 때문에 부유하는 느낌, 공기방울 효과 등 쓰리디 효과를 주었을 때 보다 화려하게 보일 수 있는 요소가 많다. 보트 위에 발이 묶여있는 주요인물들의 정적인 동선에 비해 물속 생명체들은 관객의 코앞까지 왔다갔다하면서 자유롭고 속도감 있는 움직임을 구현할 수 있다. 또 빛과 바닷물을 이용해 환상적인 풍경을 구성하고 제시하는 작업은 작업자들 스스로도 한편의 명화를 만드는 듯한 즐거움을 느꼈을 것이라 확신이 들만큼 아름다웠다. 


결과적으로 나는 영화가 소설에 최소한의 예의를 갖출만큼의 내러티브만 유지하면서 아름답고 효과적인 쓰리디 효과를 극대화하는 선택을 했으며 그것이 꽤 주요해 가장 성공적인 쓰리디 영화가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 덧붙여 이 영화가 정말 믿음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면 그것은 오히려 두 이야기 중 어느 것을 선택하느냐 혹은 신의 존재에 대한 물음이라기보다는 세상 어딘가에 우리가 아직 맞닥뜨려본 적 없는 마법같은 풍경과 장면들이 존재한다는 믿음에 더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것이 의심할 바없이 영화라는 매체가 우리에게 선사하는 가장 큰 선물 중 하나라고 확신한다. 






참치캔으로 유인한 후 기중기에 매단 손톱깎이로 깎는다.


웨이랜드 회장은 왜 자신의 탐사합류 사실을 속여야 했을까? 왜 웨이랜드 회장은 혹은 데이빗은 박사커플을 살해하려 했을까? 또 그래놓고 최후의 엔지니어를 만나러 갈때는 왜 여자박사를 데려갔는가? 캡틴과 부조종사들은 어찌그리 쉽게 자기 목숨을 희생할 수 있었을까? 이렇게 여러군데 이빨이 빠져있어 어떡!하지~납득이 안된다.

하지만 로봇 데이빗이 인간들과 대화할때 고분고분 한 듯 하면서도 틱틱거리고 사람 머리 꼭대기 위에서 쥐락펴락 뼈있는 말ㄹ

iPhone 에서 작성된 글입니다.



교과서에 시가 실리는 노작가가 열일곱 소녀를 사랑하게 된다. 그는 그녀를 사모하는 마음을 담아 소설을 한편 썼는데 <은교>라고, 그것은 그녀의 이름이다. 비록 육신은 주름지고 검버섯이 피었지만 욕망에는 나이가 없는지라 노작가는 소설 속에서라도 마음껏 그녀를 사랑한다. 하지만 이 늙은 작가의 주책맞은 소설은 어두운 서랍속에 봉인된채 누구에게도 읽혀지지 않는다. 은교를 향한 노작가의 욕망처럼.   


이 작가에게는 젊고 잘생긴 제자가 있는데 이제 막 발표한 소설이 베스트셀러가 됐다. 이곳저곳에서 사인회를 열고 여성팬들과 짐짓 쑥쓰러운척 포옹을 하거나 사진을 찍는다. 그는 자기 글을 한 쪽도 제대로 쓰지 못할때도 스승의 집에 하인처럼 들락거리며 밥상을 차리고 빨래를 하고 또 그의 바깥일을 돕고 수행한다. 그러다 서랍 속 <은교>를 보게된다. 눈이 뒤집힌다.


제자는 사실 소녀 은교를 질투하고 있었다. 그는 은교를 향한 스승의 마음을 알고 있었고 조바심이 났다. 갖은 수발을 들면서 아둥바둥 매달려 있는 자신의 입장에선 존재 자체로 사랑받는 은교가 죽일 듯이 미웠다. 남자인 그가 스승을 사랑했냐고. 어쩌면. 그도 스승을 간절히 욕망했다. 사실 그의 베스트셀러 소설은 스승인 노작가가 옛다 먹고 떨어져라며 써준 소설이었다. 그의 꿈인 소설가가 될 수 있게 해준 사람. 그 사람이 없으면 나의 꿈 소설가도 없다. 이 욕망이 사랑이 아니면 무어냐.


<은교>를 훔친 제자는 소설을 자기 이름으로 발표한다. 보는 눈이 없어 대단한 소설을 알아보지 못했던가. 생각치도 않게 소설은 호평일색. 소설 <은교>의 발표는 결국 문단의 입소문을 타고 노작가의 귀에 들어간다. 스승은 대노하여 제자의 멱살을 잡고 불호령을 내리지만 이미 스승의 소설로 작가 타이틀을 단 제자는 부끄러움을 모른다. 그 뻔뻔함의 제공자인 스승이 무슨 할 말이 있겠냐만은 아마 그에겐 제자가 소설을 훔친 것보다는 은교를 욕망하는 자기 마음이 까발려져 그녀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더 큰 분노를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소녀 은교도 소설 <은교>의 존재를 알게 되지만 노작가의 일방적인 관계 단절의 이유는 알지 못한다. 그녀에게 자기 이름이 붙은 소설의 작가는 노작가가 아니라 그의 제자다. 그 사이 소설 <은교>는 이상문학상을 수상하고 스승은 수상식 자리에 참석해 제자의, 아니 자기 소설에 대한 평을 밝힌다. 공개적으로 소설 <은교>를 제자의 것으로 인정한 것이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노작가의 생일날. 은교, 제자가 스승의 집에 함께 모인다. 그날 밤 스승은 자신이 잠든 새, 은교와 제자가 함께 뒹구는 것을 발견한다. 젊고 젊은 육체가 뒤엉켜 있는 것을 오래도록 바라본다. 


노작가는 소설 <은교>를 빼앗겼을 때는 선선히 내줬지만, 소녀 은교를 빼앗기고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제자를 위험에 빠뜨릴 함정을 준비한다. 그 함정은 언뜻 실패하는 듯 했으나 종국에는 원하던 결과를 이루어 제자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 노작가는 은교에게 자신이 제자를 죽였노라 메시지를 보낸다. 은교는 소설 <은교>의 작가가 노작가였음을 깨닫고 그를 찾아와 자신의 깨달음과 어리석음을 고백한다. 노작가는 그렇게 은교를 보낸다.  



건축이 우리를 둘러싼 환경을 아름답고 효율적으로 조직하고 가꾸는 일련의 활동을 통칭하는 것이라면 결국 우리는 한 두명의 위대한 건축가에게 모든 것을 맡길 수 없다. 실제로 우리 주변에서 이름있는 건축가의 작품인 건축물이 몇 개나 되는가. 테헤란로 어딘가에 높고 멋들어진 건물이 서 있는 것이 내 행복과 무슨 상관이 있나.  내가 사는 집, 자주 가는 가게, 동사무소, 버스정류장, 동네 공원. 결국 나를 기분좋게 해주는 대개의 건축물은 건축가들이 '컨트롤 해야 한다고 여기는 업자'들이 만들고, 평범한 공무원인 행정가들이나 소유주이거나 사용자인 시민들 스스로 관리한다. 결국 좋은 건축을 위해선 사회 전반전인 문화적 소양의 향상이 절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