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안경 다리를 분질러서 남대문에 안경을 사러갔다. 청양 지훈이방에 우산을 놓고 온 터라 비가 오는 데도 무방비로 집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동생이 만원짜리 유니클로 우산을 사라고 나가는 내 뒤통수에 대고 외쳤지만 회현역 앞에서 파는 오천원짜리 막우산을 샀다. 이미 비가 내리고 있는데 어떤 우산을 살 지 이것저것 재는 것은 사치였다.
 402번 버스로 늘 가던 길이 아니라서 조금 헤맸지만 안경점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따져보니 짧게 잡아도 6년 전부터는 그 집에서만 안경을 했던 것 같다. 당연히 안경점 아저씨랑도 꽤 안면이 트였다. 지난 번엔 길게 얘기할 기회가 있어서 하고 있는 일, 하고 싶은 일 등 여러가지 얘기를 했다. 결국 마지막에 인사하고 나가는 나에게 "꼭 꿈을 이뤄!" 라면서 주먹을 불끈 쥐어주셨다. 몸둘 바를 모르겠으면서도 예 예 하고 웃으면서 시쳇말로 훈훈했다. 근데 채 코너를 돌기도 전에 안경의 수평이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하지만 다시 돌아갈 수 없었다. 아저씨 파이팅의 여운이 아직도 가시지 않았는데 어떻게 다시 간단 말인가. 어쩌면 아저씬 불끈 쥔 주먹도 채 못 폈을지도 모르는데...결국, 난 1년 넘게 안경을 쓸때마다 수동으로 수평을 다시 맞추거나 그냥 찐따처럼 얼굴 위에 안경이 멋대로 걸쳐져 있게 놔두어야 했다. 
 건물 입구에서 우산을 접고 있는데 "어 왔어?" 하면서 아저씨가 먼저 아는 척을 해 주신다. 담배 태우러 나와 계셨나보다. 다행히 꿈 얘기는 하지 않는다. 나는 몰래 아저씨의 얼굴을 살펴본다. 젊은 시절의 한때 배우를 꿈꿨지만 지금은 맨날 싸구려 뿔테만 해 가는, 그나마 이번에는 테만 바꾸는 단골 놈의 헌 렌즈를 새 테에 끼고 있는 아저씨의 얼굴. 확실히 고전적인 미남의 상이긴 하다. 
 나는 무엇보다 수평이 맞는지 꼼꼼히 체크한 후 아저씨께서 "이번에는 무광을 써보지" 라면서 추천해준 무광 검은 뿔테(하지만 아무도 바뀐지 모르는)를 쓰고 만오천원을 드린다. "또 오겠습니다~" 
"에, 오래 써야지. 잘가~"  

2.
 남대문에서 서울역 쪽으로 걷고 있었다. 이 방향에서 버스가 있나 생각하고 있는데 한 건설사 사옥이 보였다. 이게 여깄었구나. 중연이가 생각났다. 그러자 중연이가 눈 앞에 나타났다. 이름을 크게 불렀다. 
 중연이는 양복을 입고 장우산을 들고 있었다. 가끔 회사에 다니면서 못 알아볼 정도로 아저씨가 돼버리는 친구들을 본 적이 있다. 환경에 적응한 나름의 진화일 수도 있겠단 생각을 한다. 하지만 중연이는 많이 변하지 않았다. 원래부터 좀 아저씨스러운데가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농담처럼 친구들 사이에서는 최중연을 '동급의 외모중에 가장 불행한 삶을 사는' 자로 부르곤 했었다. 빛나는 외모에 호탕하고 서글서글한 성격임에도 아주 작은 결함이 나비효과처럼 그의 삶을 엉뚱한 곳으로 인도하곤 했기 때문이다. 권승준이 엔터테이너로서 온몸으로 우리에게 던져준 것이 광대적 삶의 본류라면 중연이의 삶은 외전쯤 되겠다. 그의 에피소드는 늘 멀리서 들려오고 또 그 물리적 거리만큼의 크기로 불가해하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계단에서 중연이랑 얘기하고 있는데 같은 회사 여직원 둘이 올라오고 있었다. 한 분이 중연이를 올려다보며 호감에 충만한 미소를 지으셨다. 그 미소는 척보기에도 상대방에 대한 긍정적인 에너지로 넘쳐 흘렀기 때문에 나는 당연하게도 중연에게 인사 정도는 할 것이라 생각했고 살짝 몸을 빼서 인사할 자리를 만들려는데 그 분은 지척에서 눈을 내리깔고 스쳐지나가셨다. 오, 저것은 팬심?  
 나와 헤어져서 건널목을 건너는 중연의 씩씩한 뒷모습을 잠시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