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걸어도 걸어도'를 다시 보았다. 처음 봤을 때는 보고도 제대로 보지 못했던 부분들이
새롭게 눈에 들었다.

소년(난 참 이름에 관심이 없다)은 아버지가 없다. 새아빠는 이름을 부를 뿐 아빠라는
호칭은 쓰지 않는다. 소년이 죽음을 대하는 방식이 새아빠와의 대화에서 처음 드러난다.
새아빠=료짱은 소년에게 묻는다. 학교에서 토끼가 죽었는데 웃었다고 하더라, 왜 그랬니?
소년은 친구가 모두 토끼에게 편지를 쓰자고 하는게 웃겼다고 대답한다. 읽을 사람이
없는데 왜 쓰냐는 거다. 소년에게 죽음은 그냥 사라지는 것, 없어지는 것이었다.

소년은 료짱의 아버지, 즉 의붓 할아버지의 진찰실을 구경하다가 할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
게 된다. 꿈이 뭐냐는 질문에 피아노 조율사가 될 거라고 답한다. 이유를 묻는 할아버지에게
음악 선생님이 좋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소년에게 할아버지는 의사도 좋은 직업이라고 은근히
세뇌교육을 시작한다. 하지만 우리는 영화의 끝 부분에서 소년이 음악 선생님을 팔아 둘러댄
이유가 거짓말이었음을 알게 된다. 소년이 피아노 조율사가 되고 싶은 이유는 그것이 죽은
아버지의 직업이었기 때문이고 이는 자신의 직업(의사)을 물려받지 않는 아들에 대한 섭섭함을
지닌 할아버지의 마음에 은은하게 전달된다. 

아버지와 같은 일을 하는 것이 아버지를 사랑하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지만 소년에게는
아버지와 같은 일을 하는 것이 아버지를 아버지로 받아들이는 통로가 된다. 죽은 아버지는
없어지거나 사라지는 게 아니라 소년의 안에 있다. 료짱도 서서히 소년에게 들어갈 것이라는 
엄마의 말을 듣고 소년은 달밤에 마당에 나가 독백한다. 

피아노 조율사가 되고 싶다. 그게 안 된다면 의사가 되고 싶다. 

할아버지의 세뇌교육이 결실을 맺는 순간이다.

2.
'영화구조의 미학'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분리병치, 점진노출을 위한 자잘한 컷 구성에 혹했다가
이 영화를 보고는 다시 본래 취향으로 회귀했다. 내게 가장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점은 같은 앵글을
반복적으로 사용하면서 관객에게 공간을 익숙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는 실제 공간 중 촬영에 적합한
최소한만을 카메라에 노출시키면서 입체적이고 효율적으로 영화 속 세계를 구축하는 방법이다.
두 번째 사랑스러운 점은 주변부의 움직임을 포착해서 버리지 않는 넓은 아량의 숏들이다. 바로
다음과 같은 장면들이 그러한 예이다.
료짱과 그의 부인이 역전 식당에서 대화하는 장면. 그들 뒷편의
식당 창문 너머로 역전의 바쁜 움직임이 보여진다.

엄마, 료짱, 부인, 소년이 성묘를 하고 내리막길에
들어서면 저 멀리 후경에 기차가 등장하여 가로로 길게 움직인다.

료짱과 아버지가 일, 결혼 문제로 
날카롭게 대치하는 거실 장면 후경에는 철없는 매형과 조카들이 난리법석을 떨고 있다.

이런 장면들은 영화에 생명을 불어넣는 영화 본연의 매력 포인트 되겠다.

3.
극장에서 봤을 때는 여자들이 료짱의 어릴적 사진과 의사가 되겠다는 일기 같은 걸 보는
장면이 있었는데 이번에 다시 본 버전에는 그 부분이 빠져있었다. DVD를 체크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