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에 시가 실리는 노작가가 열일곱 소녀를 사랑하게 된다. 그는 그녀를 사모하는 마음을 담아 소설을 한편 썼는데 <은교>라고, 그것은 그녀의 이름이다. 비록 육신은 주름지고 검버섯이 피었지만 욕망에는 나이가 없는지라 노작가는 소설 속에서라도 마음껏 그녀를 사랑한다. 하지만 이 늙은 작가의 주책맞은 소설은 어두운 서랍속에 봉인된채 누구에게도 읽혀지지 않는다. 은교를 향한 노작가의 욕망처럼.   


이 작가에게는 젊고 잘생긴 제자가 있는데 이제 막 발표한 소설이 베스트셀러가 됐다. 이곳저곳에서 사인회를 열고 여성팬들과 짐짓 쑥쓰러운척 포옹을 하거나 사진을 찍는다. 그는 자기 글을 한 쪽도 제대로 쓰지 못할때도 스승의 집에 하인처럼 들락거리며 밥상을 차리고 빨래를 하고 또 그의 바깥일을 돕고 수행한다. 그러다 서랍 속 <은교>를 보게된다. 눈이 뒤집힌다.


제자는 사실 소녀 은교를 질투하고 있었다. 그는 은교를 향한 스승의 마음을 알고 있었고 조바심이 났다. 갖은 수발을 들면서 아둥바둥 매달려 있는 자신의 입장에선 존재 자체로 사랑받는 은교가 죽일 듯이 미웠다. 남자인 그가 스승을 사랑했냐고. 어쩌면. 그도 스승을 간절히 욕망했다. 사실 그의 베스트셀러 소설은 스승인 노작가가 옛다 먹고 떨어져라며 써준 소설이었다. 그의 꿈인 소설가가 될 수 있게 해준 사람. 그 사람이 없으면 나의 꿈 소설가도 없다. 이 욕망이 사랑이 아니면 무어냐.


<은교>를 훔친 제자는 소설을 자기 이름으로 발표한다. 보는 눈이 없어 대단한 소설을 알아보지 못했던가. 생각치도 않게 소설은 호평일색. 소설 <은교>의 발표는 결국 문단의 입소문을 타고 노작가의 귀에 들어간다. 스승은 대노하여 제자의 멱살을 잡고 불호령을 내리지만 이미 스승의 소설로 작가 타이틀을 단 제자는 부끄러움을 모른다. 그 뻔뻔함의 제공자인 스승이 무슨 할 말이 있겠냐만은 아마 그에겐 제자가 소설을 훔친 것보다는 은교를 욕망하는 자기 마음이 까발려져 그녀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더 큰 분노를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소녀 은교도 소설 <은교>의 존재를 알게 되지만 노작가의 일방적인 관계 단절의 이유는 알지 못한다. 그녀에게 자기 이름이 붙은 소설의 작가는 노작가가 아니라 그의 제자다. 그 사이 소설 <은교>는 이상문학상을 수상하고 스승은 수상식 자리에 참석해 제자의, 아니 자기 소설에 대한 평을 밝힌다. 공개적으로 소설 <은교>를 제자의 것으로 인정한 것이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노작가의 생일날. 은교, 제자가 스승의 집에 함께 모인다. 그날 밤 스승은 자신이 잠든 새, 은교와 제자가 함께 뒹구는 것을 발견한다. 젊고 젊은 육체가 뒤엉켜 있는 것을 오래도록 바라본다. 


노작가는 소설 <은교>를 빼앗겼을 때는 선선히 내줬지만, 소녀 은교를 빼앗기고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제자를 위험에 빠뜨릴 함정을 준비한다. 그 함정은 언뜻 실패하는 듯 했으나 종국에는 원하던 결과를 이루어 제자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 노작가는 은교에게 자신이 제자를 죽였노라 메시지를 보낸다. 은교는 소설 <은교>의 작가가 노작가였음을 깨닫고 그를 찾아와 자신의 깨달음과 어리석음을 고백한다. 노작가는 그렇게 은교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