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나 고요, 침묵의 세계. 멜빌의 인물들은 헬기를 이용해 기차에 잠입하는 고난도 액션을 하면서도 말 한마디 하지 않는다. 이들은 마치 범행을 저지르거나 임무를 수행하면서 한 마디라도 말을 하면 모든 일이 어그러진다는 신탁이라도 받은 것 같다. 첫 씬과 마지막씬의 거리도 이상하리만치 사람이 없고 황량해 잘못 계획한 한국의 신도시 풍경을 연상시킨다. 멜빌은 침묵 속에서 피어나는 긴장감의 힘을 가장 잘 이해하는 감독이다. 누차 언급하지만 영화에 사운드가 도입되면서 얻은 전리품이 바로 '침묵'이다. 멜빌은 이 침묵, 즉 다이얼로그가 소거된 사운드와 시선의 교차를 끈질기게 직조하여 독보적인 긴장감을 만들어낸다. 이것은 혼이 나갈듯하게 몰아치는 빵빵한 사운드와 눈 깜짝할 새 지나가는 빠른 화면으로 만들어내는 스릴과는 전혀 다르다. 멜빌의 세계를 들여다보고 있자면 종종 숨이 막혀 의식적으로 호흡을 가다듬어야 할 때가 있는데 이 영화의 긴장감 역시 바로 이런 류의 숨막힘에 가깝다. 


헬기에서 기차로 잠입하는 시퀀스는 아주 인상적인데 아쉬운 점은 당시 기술력과 자본의 한계 탓인지 너무 조악한 미니어처로 제작돼 몰입하기가 쉽지 않았다. 구스 반 산트가 싸이코를 리메이크 한 것처럼 누가 이 시퀀스만 원작하고 똑같이 실물 기차와 헬기를 동원해 리메이크 했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지금 얘기한 기차 씬에서 시몽이 잠입해서 옷갈아 입고 신발 벗고 하는 행동 하나하나를 디테일하게 다 보여준다. 뭐 하는지 알았으니까 그만! 됐다고! 하는 마음이 드는데도 아직 시몽은 다른쪽 신발 끈을 풀고 있다. 요즘 같으면 피디한테 혼나고 편집자한테 잔소리 들었을 그런 리듬. 물론 나는 영화에서 비효율적으로 시시콜콜하게 많이 보여주는 걸 좋아하는 취향이라 싫지는 않았다. 나는 그런 쓸데없는 컷들에서 영화의 리얼리티가 획득되는 경험을 많이 해서. 멜빌의 경우에는 그런 부분이 전체 리듬에 기여하는 바도 상당하고. 재밌는 것은 어디 블로그에서 본 리뷰에는 많이 보여주지 않아서 불친절하다고 돼있던데 내가 보기엔 너무 많이 보여줘서 불편한 느낌이 드는 거라고 생각한다.


주인공이 주로 범죄자인 경우가 많았던 거 같은데 알랑드롱이 형사로 나온다. 하지만 범죄자 못지않다. 뜨거운 더티 해리와는 다르게 아주 창백하게 못됐다. 범인이고 끄나풀이고 수틀리면 여지없이 귓방망이를 올려 붙인다. 근데 덩치 큰 용의자는 안 때리고 담뱃불 붙여준다. 나는 이게 좀 웃겼는데 앞에서 계속 때려 놓은게 있어서 때리겠지 때리겠지 하고 있는데 앵글이 의도적으로 굉장히 둘의 키 차이를 강조해서 보여준다. 알랑들롱이 엄청 올려보는 상황. 근데 표정, 눈빛은 살아있지. 용의자도 처음엔 당당하다가 그 기세에 눌려 약간 쪼는 순간에 알랑들롱이 담배를 척 꺼내 불을 붙여준다. 또 알랑드롱이 범인의 여자와 몰래 사랑하던 사이였는데 마지막에 범인을 검거하는데 여자를 이용하고는 냉정하게 떠나버린다. 근데 너무 잘생겨서 악한 게 멜랑꼴리해 보이는 효과가 있음. 순찰차 인터폰으로 오는 전화를 조수가 받아서 건네면 알랑드롱이 "응? 거기가 어디지? 가고 있어. 다시 전화할게."라고 대답하는 상황이 반복적으로 나온다. 그런데 마지막 씬에서 전화가 계속 오는데 알랑드롱이 범인 죽이고 여자 내버려두고 온 뒤라 기분이 개차반인 걸 눈치채고 아예 전화를 안 받는다. 그렇게 울려대는 전화기 소리와 멍하니 운전하는 알랑들롱의 마지막 얼굴 클로즈업은 꽤 삼삼한 감흥을 주는 구성이었다. 분명 얼굴 클로즈업 만으로는 부족했을터.


개인적으로는 답보상태에 있던 문제의 힌트를 발견할 수 있어서 유레카!였고 앞에 보면서는 다른 멜빌의 영화들에 비해 좀 약하다는 느낌이었는데 마지막 시퀀스 보면서 생각이 바뀜. 기대 안하고 있다가 뒤에서 임팩트 주니까 더 좋아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