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으로 폴 토마스 앤더슨의 장편은 모두 본 듯하다. 몇 개 안되니 참 고마우면서도 아쉽다. 그래도 꾹꾹 눌러담은 밥 한그릇 마냥 보고 나면 마음이 꽉 차는 영화들뿐이로고.

아마 이것이 그의 첫 장편? 원제가 Hard Eight 인데 추측컨데 주사위 두개를 던져 4땡으로 8이 되는 것을 Hard Eight 이라 부르는 것 같다. 제목만 보고 타짜들간의 암투 혹은 미스터 앤더슨식의 타짜 인생 관조하기 쯤으로 생각했는데 여기서 타짜는 전혀 중요한 게 아니었었던 것이었다.

존(존c.라일리)은 빈털터리. 까페 문앞에 널부러져 있는데 시드니(필립 베이커 홀)가 그를 불러세운다. 시드니는 존에게 돈을 빌려주고 라스베가스에 데려가 도박장 시스템의 빈틈을 기묘하게 이용하여 존이 기반을 마련할 수 있게 도와준다. 이때 영화는 훌쩍 2년을 건너 뛴다. 이제 존은 시드니를 스승처럼 아버지처럼 대한다(그리고 여기서 기네스 펠트로의 엉덩이와 늘씬한 각선미가 은근하지만 강력하게 관객의 몰입을 강요한다). 존은 시드니와 같은 술을 마시고 같은 옷을 입는다. 존에게는 지미(사무엘L.잭슨)라는 친구가 있는데 도박장 기도다. 그리고 기네스 펠트로는 그 도박장의 2차나가는 아가씨 클레멘타인. 시드니는 클레멘타인을 가여이여겨 돌봐주는데 그 와중에 존과 클레멘타인은 눈이 맞는다. 사실 존이 예전부터 그녀를 짝사랑해온터였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되는데 말 튼지 하루만에 결혼해버린 존과 클레멘타인은 그날 오후 다급하게 시드니에게 도움을 청하는 전화를 하게 된다. 클레멘타인이 화대를 못 받아 양아치아저씨와 실랑이를 하던 중 얻어맞고 존을 불러들인다. 둘은 양아치를 감금하고 그의 부인에게 몸값조로 화대를 요구한다. 시드니가 찾아가 둘을 진정시키고 사건을 수습한다. 존과 클레멘타인을 나이아가라 폭포로 피신시킨 시드니는 존의 친구 지미의 쪽지를 받게 된다. 지미는 시드니의 비밀을 알고 있다며 그를 협박한다. 시드니가 사실은 존 아버지의 살해범이란 걸 안다며 만달러를 요구한다. 시드니는 6천달러밖에 없다며 돈을 건넨다(6천달러는 처음 시드니가 존을 만났을 때 존이 어머니 장례식 비용이 필요하다며 요구한 액수다). 이후 돌아오고 있다는 존의 안부전화를 받은 시드니는 존에게 사랑한다고 너를 자식처럼 아낀다고 말한 뒤 지미의 집에 숨어들어가 지미가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아가씨를 품에 안고 들어오는 지미를 쏴죽인후 빼앗긴 돈을 되찾는다. 그리곤 처음 존을 만났던 까페로 가 커피를 마시며 와이셔츠 소매자락에 묻은 핏자국을 코트소매로 덮으며 영화는 끝난다.

복기하는 의미에서 줄거리를 길게 써봤는데 짧게 말하자면, 늙은 도박꾼이 자기가 죽인 남자의 아들을 돌보는 이야기이다. 막연하게 다르덴 형제의 <아들>이 떠올랐다. 물론 거기선 아들을 죽인 소년을 돌보는(?) 아버지 이야기니 뭔가 유사한 느낌이 없진 않다. <아들>이 용서'하는'것에 대한 영화라면 이 영화는 용서를 '구하는' 것에 대한 영화랄까.

시드니는 존이 자신의 비밀을 아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것은 자기 잘못을 덮기 위해서가 아니라 존의 안녕을 위해서다. 그것은 시드니가 지미에게 가진 돈을 모두 빼앗긴 후 존의 전화를 받는 순간 드러난다. 시드니는 지미와의 협상과정에서 돈을 포기한 대가로 자기 목숨과 존의 안녕을 택한다. 존의 안녕이란 시드니가 자기 아버지의 살해범이란 사실을 계속 모르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고 자신이 그의 곁을 떠나는 것이다. 하지만 존과 통화하는 동안 시드니는 그가 존을 진심으로 아끼고 있음을 깨닫고 존의 곁에 머물것임을 선언한다. 그리고 어쩌면 비밀을 고백할 각오까지 했을지 모른다. 실제로 시드니는 그 통화에서 고백의 늬앙스를 한껏 풍긴다. 결국 시드니는 지미를 해치움으로써 존과 그 사이의 장애물을 원천적으로 제거한다. 이제 둘 사이의 문제는 온전히 시드니의 판단에 따라 좌지우지 될 상황에 놓였는데 그것은 비밀을 고백하느냐 마느냐 하는 선택의 기로이다. 하지만 마지막 장면에서 시드니는 하얀소매의 붉은 핏자국을 코트소매를 스윽 덮어버림으로서 자신의 비밀을 그 핏자국처럼 쉽게 드러내지 않을 것임을 결심한다. 존은 여전히 그를 아버지처럼 존경할 것이고 고뇌와 용서를 구하는 마음은 온전히 시드니의 몫으로 남을 것이다.


-필립 세이무어 호프만

보니까 토마스 앤더슨도 자주 작업하는 배우들이 있는 것 같다. 존 역의 존C.라일리도 그런 것 같고, 중간에 단역으로 나왔던 필립 세이무어 호프만도 그런 케이스. 특히 <펀치 드렁크 러브>에서 인상적인 악역을 보여줬던 필립 세이무어 호프만은 여기서 예의 그 될성부른 떡잎을 보여줬다고 해야하나...아무튼 굉장히 돋보이는 단역을 연기했다. 시드니가 존과 클레멘타인의 구조요청을 받기 바로 직전 씬에서 호프만과 도박장에서 마주친다. 호프만은 매우 시건방지고 깐죽대는 캐릭터를 맡았는데 <펀치...>에서의 악역의 젊은 시절쯤 되는 캐릭터다. 시드니를 늙은이라 비웃으며 연신 낄낄거리는데 이는 시드니를 도발하고 왕년의 막나가는 도박꾼 시드니의 면모를 슬쩍 드러내는 동기를 부여한다. 또 동시에 이 씬은 시드니가 본격적으로 곤경에 빠지기 시작하는 전조를 보여줌으로써 매우 효과적으로 기능한다. 인상적인 캐릭터와 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