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말이 마음에 안든다. 친구위해 적들의 총탄에 몸 던지는 홍콩느와르냐 아니면, 이왕 버린 몸 내 몸 받쳐 널 구원하리는 예수 그리스도? 따발총 세례받고 잔디밭에 드러누운 클린트 할아버지, 그 곱게 누우신 동작이...분명히 내가 오바스럽게 본거라고 애써 믿는데... 행여라도 십자가에 못박힌 포즈였다면...정말 실망이다. 그 숭고한 죽음의 기름끼 빼려고 일찌감치 피 토하고 병원가서 뭐 알수 없는, 하지만 심각해보이는 진단서 받아오고...이해는 하는 데 난 그 선택이 좀 그렇다.
하지만 솔찍히 까놓고 말해서 "너라면 어떻게 할래?" 라고 물으면 "그거 알면 내가 클린트 이스트우드지..." 라며 쭈뼛될 수 밖에 없을듯. 그의 죽음을 놓고 역시 공화당원! 한다면 문제가 쉬워지느냐. 그럼 민주당원 감독이면 어쩔래? 희망의 인문학, 클레멘트 코스로 갱들에 인문학 교육시켜서 자기를 표현하는 능력을 길러줄까. 어느세월에... 수강신청도 시키기 전에 타오 총맞아 뒤지겠다.
누가 이 영화에서 가장 좋은 한 장면만 고르라고 한다면,
"아 쉽습니다. 바로 '신부님께 고해성사를 하는 월터'와 '타오를 지하실 철망문 안에 남겨두고 혼자 복수하러 떠나는 월터'의 대구가 그것이지요."
영화초반 월터가 유일하게 괜찮게 생각한 인물은 그의 부인인데, 이미 죽은 사람이다. 자식들은 웬수같고, 손주들은 흡혈귀같아 .
그리고 부인이 죽기 전에 남편의 회개를 부탁하고 간 신부에게 월터가 한 고해는 진짜 고해가 아니었다. 형식적인 고해였을 뿐. 정작 그가 고해한 것은 지하실 철망문을 사이에 두고 부득부득 제 누나의 복수는 제가 하겠다는 어린 타오에게였다. 자기가 평생 짊어지고 온 죄(전쟁터에서 사람을 죽였다는)를 윽박지르듯이 고백한다.
공간 설정의 중요성을 재확인했다. 단편의 울타리 너머는 언감생심이다보니 '공간'에 대한 고민은 늘 장소의 갯수를 줄이거나 촬영의 용이한 환경에 우선순위를 두는 쪽으로 편중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효과적인 공간 설정은 단순히 극이 진행되는 배경이 아니라 인물들을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과 영화속 세계의 생명력을 부여하는 중요요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