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일야화>,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 1974

"하나의 꿈은 이야기 전체를 말하지 않지요. 진리는 여러개의 꿈 안에 존재해요."



야한것은 참 좋다. 물론 야한 영화를 보는 것은 실제로 야한 짓을 하는 것 보단 김빠지는 일이지만 상대적으로 안전하다는 장점이 있다. 야한 짓에는 많은 경우 위험이 따르고 어쩌면 그 위험과 야함은 불가분의 관계일 수도 있다. 위험과 야함이라니 파졸리니의 죽음이 연상된다(물론 조심스럽다, 나는 겉으로 드러난 사실조차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다). 그는 마르크스주의자였고 동성애자였다. 그는 로마 외곽의 오스티아 해변에서 죽임을 당했다. 장이 파열되고 얼굴은 짓이겨져 신원을 확인할 수 없을 정도로 폭행당한 상태였다. 놀랍게도 검색해보면 사진이 나온다. 차마 퍼올 순 없었다. <살로, 소돔..>에 출연했던 17세 소년 피노 펠로시의 단독 범행이라는 공식 발표가 있었지만 그의 가슴을 밟고 지나간 자동차 바퀴 자국 등 납득할 수 없는 문제들은 끝까지 풀리지 않았다. 다만 그에게는 적이 많았다는 점을 참고하자. 다시 한번 언급하자면 그는 마르크스주의자였고 동성애자였다.

천일야화는 엄청 야하다고 한다. 제대로 읽어본 적은 없다. 파졸리니는 그 천일밤의 이야기 중 열개를 골라 영화에 담았다. 원작을 제대로 모르니 둘을 비교할 수는 없다. 다만 영화에선 확실하게 파졸리니의 욕망이 드러난다는 점을 이야기 하고 싶었다. 마지막 씬에서 왕이 된 여성노예가 헤어졌던 주인 소년을 만나 자신의 정체를 고백하기 전에 그를 침대에 눕힌 후 엉덩이를 까보이게 하는 장면을 노골적인 파졸리니의 시선으로 느낀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그렇다면 혐의를 파졸리니에게 국한시키지 말고 모든 영화감독에게 확장시켜 생각해보자. 카메라가 감독의 시선이 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시비를 가릴 문제는 아니다. 그럴 능려도 없고 생각도 없다. 솔직하게 내 감상을 풀어놓는게 지금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인 것 같다. 소년의 엉덩이를 카메라가 정면으로 보여주는 순간 동성애자 파졸리니가 불쑥 솟아올랐다. 순간 나는 영화에서 소외됐고 파졸리니는 저 소년과 잤을지도 모르거나 최소한 자고 싶어할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흑인 여자의 탄력적인 몸을 보며 얼굴이 조금 더 갸름하게 생겼으면 완벽할 텐데란 생각을 하며 그녀와 자면 어떨까 상상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