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똥파리>, 양익준, 2008

부모 자식간에 아무 문제도 없는 집이 있을까. 나 역시 그 고민을 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좋은 해결책을 생각해 낼 수 있었던 적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문제는 쉽게 덮혀지고(해결은 아니다) 그 때마다 나름의 방법으로 사태에 대처하지만 그 대부분은 적당히 인내하거나 포기하거나 기만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대가는 애증으로 점철된 처절한 가족사다. 

'처절'이란 말을 정말로 써도 될까. 우리 집은 <똥파리>에 비하면 전혀 처절하지 않다. 그리고 굳이 <똥파리>까지 가지 않더라도 주변 누군가의 처절함은 이미 나의 것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러나 그 모든 더 심한 처절함들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있어서는 나의 가족사야말로 진짜 처절이고 처절의 전부다.

감각은 늘 우리를 희롱한다. 좁은 시야의 내 앞에선 내 고통이 효도르처럼 크고 무섭게 보이다가도 링위에 <똥파리>와 내 고통이 맞붙고 있는 걸 멀리서 보게 되면 내 고통은 오히려 고통이라 부르는게 무안할 정도의 풋내기라는 게 명확해진다. 하지만 그러다가도 다시 내 곁에 오면 효도르가 된다. 너 아까는 그렇게 작았던 주제에! 라고 아무리 외쳐봐야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맞는 것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 뭐가 잘못된건 없다. 그냥 고통이 내 것일 때와 내 것이 아닐 때란 원래 그런 것인갑다 할 뿐이다. 

다만, 난 이 핏줄 문제로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다. 내 고민의 무게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으로 영화를 만들고자 했을 때는 또 상황이 다르다. 보는 사람에게 말을 거는거니까. 어떻게 보일지. 이 고통이 객관적인 링 위에서 어느 정도의 체급으로 보이느냐에 대한 인식이 필요하다. 이런 고민에 같이 영화를 본 후배는 '쉽게 공감할 수 있는 보편성'이라는 장점에 무게를 실어주기도 했다. 하지만 좀 힘이 빠지는 것도 사실이다. 덜 불행해서 고민이라는 푸념이라니...배가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