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춘기 소녀와 어린 남동생은 호주의 광활한 아웃백에서 길을 잃고 굶주림과 갈증, 추위를 피해 방랑한다. 막장 아버지 탓인데 셋이서 소풍처럼 떠난 여행에서 아버지는 자식들을 향해 피스톨을 갈기더니 차를 불태우고 자신의 턱 밑에다 총구를 겨눠 자살한다. 황량한 황무지를 떠돌던 남매는 가까스로 발견한 오아시스에서 평온을 찾는 듯 했으나 하룻밤만에 말라버린 오아시스에 망연자실 널부러져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 남매의 눈앞에 도마뱀을 사냥하는 에버리진(aborigine-호주원주민) 소년이 나타난다. 통과의례의 하나로 아웃백을 방랑하며 생존의 기술을 터득하고 연마하는 소년에게 의지하여 두 남매는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구하고 이후 셋은 방랑의 동료가 된다.

굉장히 매혹적이고 대담한 몽타주씬들이 많은데 원주민 소년과 남매가 나무 타기를 하며 즐거워하는 장면과 원주민 부족민들이 불탄 차량과 남매 아버지의 시체를 발견한 장면을 교차편집한 씬이 인상적이었다. 영화 전반의 분위기를 지배하는 정서 중의 하나가 사춘기 소년 소녀가 다른 문명에서 온 서로의 낯선 육체를 미묘하게 응시하며 발생하는 성적 긴장감인데 이것이 이 몽타주에서 폭발적으로 드러난다. 나무에 거꾸로 매달려 치마가 들쳐내려가는 소녀와 야생에서 단련된 탄탄한 소년의 검은 몸이 두꺼운 나뭇가지 위에서 흔들거리고 불탄 차량을 오르락 내리락하며 놀이터처럼 이용하는 에버리진들의 알몸이 조응하여 긴장감을 증폭시킨다.

후에 원주민 소년은 백인들이 짚차와 총을 이용해 사냥하는 모습을 보고 큰 충격을 받는다. 그것은 생존을 위한 사냥이 아니라 단순한 살육이었다. 이에 그는 몸에 하얀 칠을 하고 양손에 꽃을 들고 밤새 춤을 춘다. 글쎄, 로저 에버트는 <위대한 영화>에서 이 춤을 소녀를 위한 구애의 춤이라고 해석하고 있고 나 역시 이 해석에 전반적으로 수긍하긴 하지만 영화를 보는 당시에는 이것이 백인 문명과의 유일한 소통창구인 소녀에게 살육에 대한 일종의 항의이거나 살육당한 동물의 영혼을 위로하는 것처럼 느껴진 것이 사실이다. 소녀는 이 춤에 상당한 위협을 느끼고 동생과 떠나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다음날 원주민 소년은 "이상한 열매" 처럼 나무에 목을 매고 죽어있다. 

영화의 엔딩은 무사히 문명사회로 돌아온 남매의 몇 년 후의 모습을 보여준다. 소녀는 화장이 짙어졌고 담배를 피며 요리를 준비하고 있다. 도마 위에 놓인 고기를 썰고 있는데 그 질감이 말랑말랑하고 피가 흥건하게 적셔져 있어 흡사 간처럼 보이는 고기를 서걱서걱 썰고 있다. 그때 남자가 퇴근해서 집안에 들어온다. 그녀를 뒤에서 안으며 회사 이야기를 한다. 이번에 승진하게 됐다며 나이많은 누구누구씨를 밟고 올라가는 것이다. 그가 직업을 잃겠지만 그 사람 잘못도 있으니....이렇게 이어지는 말에 나이든 소녀는 시선이 멀어지며 오래 전 아웃백을 헤매던 당시의 한 순간을 떠올린다. 커다란 못에서 알몸으로 셋이 헤엄치던 아주 즐거웠던 순간을 말이다.



인상적인 점을 덧붙이자면 문명세계와 아웃백의 공간 전환시의 컷들이 굉장히 재미있게 배치되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처음 아버지와 남매가 소풍을 떠날 때 나오는 황량한 황무지의 컷은 빨간 벽돌 벽에서 트랙킹하여 황무지로 전환된다. 마치 세트처럼 벽돌벽 옆 황무지!인 것이다. 또 후에 남매가 문명세계로 넘어갈때는 광활한 산맥-> 황무지-> 숲 너머로 빼꼼 솟아있는 크레인-> 크레인 원경-> 철창 너머의 인공적인 나무들-> 도시풍경 순으로 공간의 변화가 점진적으로 드러나는 컷들이 순차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그리고 나이든 소녀가 헤엄치는 순간을 회상할 때는 회색 벽돌벽, 빨간 벽돌벽, 못 주위의 암벽, 또 암벽 순으로 문명의 것과 자연의 것이 대구를 이루며 컷을 구성하고 있다.    

둘째는 마지막에 나이든 소녀와 이야기하는 남자의 정체다. 처음에는 이 소녀가 성장해서 결혼한 남편이라고 생각했는데 두번째로 훑어보면서 이 남자가 동생이지 않을까라는 의심을 하게 됐다. 이렇게 생각하면 영화가 훨씬 더 다면적으로 다가오는데 여자가 회상하는 장면에 원주민 소년까지 셋이서 헤엄치는 장면과 대응해서 완벽한 후일담이 완성되기 때문이다. 황무지에서 방황하던 당시에 소년은 누나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원주민 소년과 원활하게 소통하고 있었다. 철저하게 문명세계의 습속을 지키려 하고 원주민 소년에게 미약하나마 호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으로 그와 소통하려는 모습은 단 한번도 비치지 않았던 누나에 비해 어린 소년은 처음부터 바디랭귀지로 그와 대화했고 나중에는 조금씩 에버리진의 단어도 사용했었다. 그랬던 동생이 소녀가 과거를 회상하는 동안 현대인의 삶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대사를 하는 것은 훨씬 더 효과적으로 영화의 주제를 전달할 수 있는 설정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