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nding Forrester, Gus Van Sant, 2000 
 
1
포레스터 
(자말과 마주앉아 타이핑을 하면서, 탁탁 탁탁탁...)
네가 이 자판을 치기 시작하면 너도 글을 쓰기 시작하는 거라구.

자말 
……

포레스터 
왜 문제가 있니?

자말 
아니요 생각하고 있어요.

포레스터 
안돼 생각하지 마라. 생각은 나중에 하렴. 
넌 너의 마음으로 초안을 써야해. 그리고나서 머리로 수정을 하는 거야.
글쓰기의 가장 중요한 요점은 글을 쓰는 거야. 
생각하는 것이 아니구.

2
<파인딩 포레스터>는 이론의 여지가 없는 장르영화다. 개천에서 용나는 줄거리이면서 상처받은 어르신의 상처 치유기이기도 하다. 이무기에서 용이 되려는 자말의 유일한 반대 세력은 크로포드 교수를 중심으로 하는 학교의 이사회이다. 물론 이 이사회에는 자말과 러브라인을 형성하는 클레어의 아버지를 포진시킴으로써 로미오와 줄리엣의 구도가 성립된다. 자말의 성장배경과 재능을 일치시키는 것이 너무 어려웠던 크로포드는 그를 의심하고 이것이 자말과 은둔 작가 포레스터를 곤경에 빠뜨린다. 하지만 포레스터와의 신의를 지킨 자말의 우정과 뛰어난 글쓰기 재능은 포레스터를 세상 밖으로 끌어냄과 동시에 영화상의 모든 갈등을 해결하고 종결시킨다. 

2000년 개봉 당시에 봤을 때는 재즈 풍의 썸웨어 오버 더 레인보우가 흐르는 풍경 위로 밤거리를 자전거로 달리는 포레스터의 매끄러운 이미지가 강하게 각인된 영화로 기억됐다. 하지만 오늘 다시 본 <파.포.>는 <게리>,<엘리펀트>,<라스트 데이즈>의 구스 반 산트 감독을 생각하면 의외로 다가오는 영화다. 

<파인딩 포레스터>에서 흑인 소년 자말이 겪는 갈등이 해결되는 방식은 일방적이고 일회적이다. 글쓰기 경연대회에 포레스터가 나타나 자말의 편지를 읽으며 분위기를 반전시킬 때도 크로포트 교수는 완고했다. 하지만 그에 무색하게 이사회의 다른 교수는 크로포트의 발버둥을 제압하고 자말의 손을 들어준다. 결국 자말을 가로막고 섰던 것은 크로포트 교수의 자존심 뿐이었다. 모든 오해는 포레스터가 풀었고 그로 하여금 그렇게 행동할 수 있게 한 것은 자말의 능려과 신의를 지킨 우정이었다. 이것은 판타지다. 그것도 진실을 가리는 위험한 판타지. 이 영화의 소재는 매력적이다. 가난한 흑인 소년의 뛰어난 재능이 상처 받은 위대한 작가의 영혼을 치유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식의 장르영화는 감독이 소재에 대해 가지는 정치적 선의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는 정반대의 효과를 내기 쉽다. 이 상황에서 나는 타란티노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건강한 장르영화란 오히려 타란티노의 영화들이 아닐까. 

구스 반 산트의 필모를 보면 본인이 하고 싶은 영화와 해야 하는 영화를 번갈아 찍은 것 같은 인상을 받게 된다. 유연하고 현실적인 행보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의 취향은 극단의 경계에선 사람들에게 우호적이다. 브레송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