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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tien Vives, <Le gout du chlore>
헐렁한 그림체와 수영장의 푸른 빛. 완벽한 완급의 연출과 짝사랑의 달콤씁쓰름함. 이것이 염소의 맛입니다. 수영과 그림그리기를 하고 싶게 만드네요. 메~헤헤헤에에
 


죄악의 천사들, 로베르 브레송, 1943

1
안느 마리는 속세의 화려함을 좋아하는 처녀임에도 불구하고 신실한 마음에 이끌려 수녀가 된다. 그녀가 머무는 수녀원은 교도소의 출소자들을 받기도 하는 개방적인 수도원인데 원장 수녀를 따라나선 교도소 방문에서 안느 마리는 떼레즈라는 난폭한 여죄수를 만나게 된다. 이 만남 이후 신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확신한 안느 마리는 떼레즈를 수도원으로 데려와 그의 후견인이 되기를 자처한다. 하지만 출소한 떼레즈는 처음에 수도원 행을 거절했다가 자신을 감옥에 가게 한 전 남자친구을 살해한 후에야 도피처로 수도원을 이용한다. 안느 마리는 떼레즈에게 신심을 쏟는 데 몰두한 나머지 수도원의 규율을 어기고 다른 수녀들과 마찰을 일으킨다. 안느 마리의 관심이 귀찮은 떼레즈는 안느 마리와 생 존 수녀를 이간질 하여 결국 안느 마리를 내쫓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신실한 안느 마리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은 채 밤마다 몰래 수도원에 들어와 설립자의 무덤 앞에서 기도를 올리다 병약한 몸을 주체 못하고 쓰러진다. 결국 안느 마리는 수도원에서 원장 수녀님과 동료 수녀들의 애도 속에 죽음을 맞이 한다. 떼레즈는 안느 마리의 헌신적인 죽음 앞에 눈물을 흘리며 수도원을 찾아온 경찰에게 손목을 내주어 수갑을 찬다. 

2
영화사에서 유일무이한 독특한 스타일을 구축한 브레송의 첫 번째 장편작품인 만큼 이후에 정립된 그의 영화형식과의 비교를 통해 그가 출발점에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갔는가를 가늠해보는 것이 흥미로운 감상의 포인트가 될 것이다.

주제적인 측면에서는 브레송 초기 영화들과 일맥상통한다. 신실한 희생과 숭고한 죽음. 신념을 위해 어떠한 장애물에도 타협하지 않고 설사 그 끝에 죽음이 놓여 있다해도 멈추지 않는 인물들은 브레송 영화의 전형이다. 물론 차이점도 있다. 무엇보다 <죄악의 천사들>에서 배우들은 연기를 하고 있다. 연기는 연극의 산물이며 영화에서는 필요없다 라는 브레송의 영화관은 아직 정립되지 않았던 시기이다. 또 클로즈업을 통한 제유법을 구사하는 화면구성도 발견되지 않고 있다. 오히려 화려하고 매끄러운 카메라 무빙이 종종 발견되고 전통적인 방식의 컷 구성방식을 유지하고 있다. 또 사운드와 이미지를 비종속적으로 사용하는 그의 개성도 아직은 눈에 띄지 않는 듯 했다. 다만 과감한 내러티브의 생략과 파편화된 에피소드의 구성은 맹아적인 형태로나마 존재함으로서 후에 만개하는 브레송 스타일의 본류로 여겨질 만하다. 

3
위의 특징들과 더불어 관념적인 대사들은 영화의 내용 파악을 어렵게 하는 요소로 작용한다. 한글 자막으로 본 대사들이 과연 프랑스어로 된 본래의 대사와 과연 어느 정도의 간극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첫 시퀀스의 첩보작전을 방불케 하는 한 여죄수의 수도원 입성 장면은 수녀원에 대한 설명을 위한 정보 제공 외에 어떤 기능을 하는 것인지, 또 그 수녀는 안느 마리와 떼레즈의 관계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질문하게 됐지만 어떤 유효한 답을 구하지 못했다. 좀 더 생각해볼 문제다.
   



Finding Forrester, Gus Van Sant, 2000 
 
1
포레스터 
(자말과 마주앉아 타이핑을 하면서, 탁탁 탁탁탁...)
네가 이 자판을 치기 시작하면 너도 글을 쓰기 시작하는 거라구.

자말 
……

포레스터 
왜 문제가 있니?

자말 
아니요 생각하고 있어요.

포레스터 
안돼 생각하지 마라. 생각은 나중에 하렴. 
넌 너의 마음으로 초안을 써야해. 그리고나서 머리로 수정을 하는 거야.
글쓰기의 가장 중요한 요점은 글을 쓰는 거야. 
생각하는 것이 아니구.

2
<파인딩 포레스터>는 이론의 여지가 없는 장르영화다. 개천에서 용나는 줄거리이면서 상처받은 어르신의 상처 치유기이기도 하다. 이무기에서 용이 되려는 자말의 유일한 반대 세력은 크로포드 교수를 중심으로 하는 학교의 이사회이다. 물론 이 이사회에는 자말과 러브라인을 형성하는 클레어의 아버지를 포진시킴으로써 로미오와 줄리엣의 구도가 성립된다. 자말의 성장배경과 재능을 일치시키는 것이 너무 어려웠던 크로포드는 그를 의심하고 이것이 자말과 은둔 작가 포레스터를 곤경에 빠뜨린다. 하지만 포레스터와의 신의를 지킨 자말의 우정과 뛰어난 글쓰기 재능은 포레스터를 세상 밖으로 끌어냄과 동시에 영화상의 모든 갈등을 해결하고 종결시킨다. 

2000년 개봉 당시에 봤을 때는 재즈 풍의 썸웨어 오버 더 레인보우가 흐르는 풍경 위로 밤거리를 자전거로 달리는 포레스터의 매끄러운 이미지가 강하게 각인된 영화로 기억됐다. 하지만 오늘 다시 본 <파.포.>는 <게리>,<엘리펀트>,<라스트 데이즈>의 구스 반 산트 감독을 생각하면 의외로 다가오는 영화다. 

<파인딩 포레스터>에서 흑인 소년 자말이 겪는 갈등이 해결되는 방식은 일방적이고 일회적이다. 글쓰기 경연대회에 포레스터가 나타나 자말의 편지를 읽으며 분위기를 반전시킬 때도 크로포트 교수는 완고했다. 하지만 그에 무색하게 이사회의 다른 교수는 크로포트의 발버둥을 제압하고 자말의 손을 들어준다. 결국 자말을 가로막고 섰던 것은 크로포트 교수의 자존심 뿐이었다. 모든 오해는 포레스터가 풀었고 그로 하여금 그렇게 행동할 수 있게 한 것은 자말의 능려과 신의를 지킨 우정이었다. 이것은 판타지다. 그것도 진실을 가리는 위험한 판타지. 이 영화의 소재는 매력적이다. 가난한 흑인 소년의 뛰어난 재능이 상처 받은 위대한 작가의 영혼을 치유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식의 장르영화는 감독이 소재에 대해 가지는 정치적 선의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는 정반대의 효과를 내기 쉽다. 이 상황에서 나는 타란티노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건강한 장르영화란 오히려 타란티노의 영화들이 아닐까. 

구스 반 산트의 필모를 보면 본인이 하고 싶은 영화와 해야 하는 영화를 번갈아 찍은 것 같은 인상을 받게 된다. 유연하고 현실적인 행보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의 취향은 극단의 경계에선 사람들에게 우호적이다. 브레송처럼 말이다.

조형적 이미지로 구성된 얼굴 없는 군중.
심지어 가장 안쪽 사람은 이본이 지나가는데도 계속 얼굴을 술집 안쪽으로 향하고 섰다. 

저 입술...



이 영화의 원동력은 거의 전부 힛걸에게서 나온다. 쟤가....저거저거....아이구....아....카타르시스와 염려가 뒤범벅댄 감정으로 힛걸을 바라보다보면 영화는 술술 잘 흘러간다. 킥 애쓰는 각성하는 찌질이의 전형에서 그 각성의 정도를 얕게 조절한 전형적인 캐릭터일 뿐이며 슈퍼 히어로의 인간적인 고뇌를 담기에도 그릇이 작다. 정작 그는 전혀 슈퍼 히어로도 아니지...오직 힛걸만이 그 액션만큼이나 화려하고 다양한 감정을 담아낼 수 있는 기반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조금이나마 활용한다. 어차피 영화는 그런 측면에서의 목표를 크게 잡고 있는 것 같진 않지만서도. 
후속편을 작정하고 만들겠다는 엔딩을 보면서 다음 편의 힛걸은 좀 더 섹시할 수 있는 나이 때로 성장해서 나오지 않을까 추측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요 발칙한 꼬마 배우가 실제 성장한 모습으로 재출연할 수도 있겠군. 개인적으로는 저 입술의 잠재력을 매우 크게 보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힛걸은 이미 이 영화에서도 귀여움을 가장해 킥애스에게 손키스를 날린바 있다. 그리고 스쿨룩 베이스의 여전사라니 이미 충분히 오덕스럽다.  

레옹의 마틸다



그나저나 난 계속 마틸다가 오버랩됐다. 이 사진은 좀 노숙하게 나왔다만 마틸다도 엄청 꼬마였는데... 
단발에 도톰한 입술이 공통점이라면 공통점이지. 실력은 극과 극이지만 둘다 총도 좀 들어주시고.

마틸다 생각난 김에 레옹이나 다시 볼까하는데 이것도 보려면 마음 단단히 먹어야 해서..쉽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