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여쁜 처자와 섹스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내 위에 올라 타 있었는데 가느다란 팔로 가슴을 가리고는 꺄르르 웃었다. 그녀가 내려간 뒤 난 그녀 뒤편의 창문으로 건너편 집 내부를 볼 수 있었다. 중년 여자가 고개를 조금 숙인 채 천장 가까이에 서 있었다. 너무 키가 커 보여서 궁금한 마음에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 중년여자는 키가 큰 것이 아니라 밧줄로 목이 매인 채 천장에 매달려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덩치가 매우 큰 남자가 어린 소년의 목을 역시 밧줄로 조르고 있었다. 아이는 발버둥치고 있었지만 엄청난 완력의 남자 앞에 무기력해보였다. 이 장면을 목격한 순간, 나는 전신에 소름이 돋으며 행여 들킬까 창문 아래로 몸을 숨겼다. 아직도 방실방실 웃고 있는 어여쁜 처자를 창문에서 멀찌감치 밀쳐놓고 다시 고개를 빼꼼히 내밀어 건너편을 바라보니 이번엔 사내가 우뚝 서서 목을 조르던 소년의 이마에 기다란 장총의 총구를 대고 방아쇠를 당기려하고 있었다. 숨이 턱 막힐듯한 공포에 몸을 떨며 꿈에서 깼다. 너무나 생생한 두려움과 이게 다 꿈이어서 다행이라는 마음이 교차하는 순간 나와 섹스를 하던 어여쁜 처자가 소시의 윤아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도대체 왜 이 꿈의 방점은 섹스가 아니라 건너편 집의 끔찍한 사건 현장에 찍혔단 말인가. 이 꿈은 왜 이렇게도 잔인하게 구성되어야만 했을까. 난 꿈을 꾸면서 한 번, 꿈을 꾸고 나서 또 한 번 치를 떨어야 했다. 
 

<파리대왕>, 해리 훅, 1990


1.
개인적으로 인간의 본성에 대해 쉽게 이야기 하는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사람이 원래 다 그렇지...라고 말하면서 제 치부를 인류 공통의 문제로 손쉽게 떠넘겨버리는 게 영 탐탁치 않아서다. 다른 시대, 다른 문화 속에 한 번도 속해보지 않은 주제에 어찌 그리 쉽사리 인간의 본성에 대해 확신하는지 그 가벼움에 닻이라도 달아주고 싶다. 

자칫 <파리대왕>은 인간 본성에 대한 우화로 보일 수도 있다. 무인도의 폐쇄성과 아이들의 순수함이 그런 시각에 더욱 힘을 실어주기도 한다. 하지만 이미 이 아이들은 표류될 때 군사학교의 제복을 입고 있던 아이들이다. 뗏목을 만들어 섬을 탈출했다가 러시아인들에게 구조되면 포로취급을 받지 않을까 걱정하는 아이들이다. 다시 말하자면 이 생존 실험의 양상이 인간 본성에 의한 필연적인 결과가 아니라는 것이다. 영화의 비극적인 결말은 오히려 이 아이들이 그 때까지 자라온 사회의 축소판, 모든 분야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진보한 문명이라 스스로 자부했을 냉전시대의 반영인 것이다.

2.
'살해'는 <파리대왕>을 관통하는 하나의 키워드다. 영화에는 총 네번의 살해가 벌어지는데 그 대상은 카멜레온, 벤슨 기장, 싸이먼 그리고 피기다. 이 살해의 의미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주요 인물들과 그들의 성격을 살펴보는 것이 필수적이다. 

가장 중요한 두 인물은 랄프와 잭이다. 랄프는 인본주의 성향의 리더이고 끝까지 섬에서 탈출할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반면에 잭은 폭력적이고 공격적인 성향의 권위적인 리더이며 탈출보다는 섬 생활에의 적응에 더 무게중심을 둔다. 이 둘의 대립과 그에 따른 추종자들의 세력 재편이 영화의 주요 흐름이다. 랄프가 시종일관 같은 모습으로 평면적인 인물로 남는데 비해 잭은 점점 권력의 늪에 빠져 자신을 따르는 무리 전체를 광기의 불구덩이 속으로 이끈다. 추종자들이 점점 늘어나는 잭이 랄프에 비해 압도적으로 유능한 리더로 보이는데 그의 통치술의 핵심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바로 밥과 공포다. 채집을 위주로 하는 랄프 캠프에 비해 돼지 사냥에 주력하는 잭의 추종자들은 지속적으로 고기를 공급 받을 수 있다. 이 고기 때문에 많은 아이들이 랄프를 떠나 잭에게로 투항한다. 또 잭은 추종자들의 마음 속에 공포심을 심어 놓고 그것을 컨트롤하여 통치한다. 잭의 무리는 섬의 한 동굴에서 정체불명의 생명체와 조우한다. 잭은 그 생명체를 '괴물'로 부르며 자신들의 공동체를 위협하는 가상의 적으로 삼는다. 이로써 추종자들은 늘상 보이지 않는 외부의 적과 대항해야 하는 공동체의 파수꾼으로 강제된다.  
   
하지만 실상 그 괴물은 이들의 표류가 시작될때 함께 섬에 떠밀려온 벤슨 기장이다. 이미 바다 속에서부터 심각한 부상으로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던 그는 정신이상 때문에 혹은 잭의 무리가 자신을 제거하려하는 낌새를 느끼고 아이들로부터 달아나 동굴 속에 몸을 숨겼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처음 발견한 잭의 추종자가 놀라서 찌른 창에 이미 목숨을 잃은 채 괴물로 불리웠던 것이다. 이 모든 사실은 호기심 많고 생명에의 사랑으로 충만한 싸이먼에 의해 밝혀진다. 벤슨이 도망치기 전부터 그를 간호했고, 숲에서 만난 카멜레온을 늘상 데리고 다녔던 싸이먼은 흉흉하게 퍼진 괴물 이야기에 곧 벤슨을 떠올리고 동굴 속으로 들어가 그의 시체를 확인한다. 마침 해변에서는 잭의 무리들이 사냥한 돼지와 모닥불을 놓고 광기에 찬 사냥 의례를 벌이고 있었다. 이들을 향해 야광봉을 밝힌 채 해변을 달려오던 싸이먼은 엑스터시 상태의 아이들에게 괴물로 보이고 그들로부터 무자비한 공격을 받는다. 차갑게 식은 싸이먼의 등에는 무수한 창구멍이 뚫렸다.

싸이먼의 죽음 이후 랄프의 무리에는 피기만이 남았다. 피기는 섬에서 유일하게 안경을 쓴 아이로 뚱뚱하고 신참인지라 시종일관 랄프를 제외한 다른 아이들에게 무시를 당한다. 피기의 안경 렌즈는 불을 피우는데 유용한 도구이기 때문에 잭 일당이 한밤중에 습격해 강탈해가기에 이른다. 랄프와 피기는 안경을 되찾으러 갔다가 잭과 충돌한다. 그 와중에 피기는 아이들을 설득하는데 처음엔 그의 말을 무시하고 야유를 보내던 아이들이 다음과 같은 말을 듣자 조용해진다. "언제까지 애들처럼 굴순없어. 구조되지 못한다면 평생 여기서 지내야 할 수도 있어. 이젠 이성적으로 행동해야돼." 외면하고 싶었던 진실을 들어서일까 피기가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절벽위에서 한 아이가 굴린 커다란 바위가 피기를 덮친다. 

3.
싸이먼이 돌보던 카멜레온은 잭의 무리에게 사냥 연습용으로 죽임을 당한다. 역시 잭이 돌보던 부상당한 벤슨 기장은 잭의 무리에 의해 괴물로 오인받아 죽임을 당한다. 모든 진실을 알게 된 싸이먼은 엑스터시 상태의 잭 무리에게 괴물로 지목당해 죽임을 당한다. 현실을 받아들일 것을 요구했던 피기는 잭의 무리에 의해 의도적으로 살해당한다. 

첫번째 살해에서 네번째 살해로 갈수록 잭 무리의 살해의지가 강해진다. 카멜레온의 살해는 관객에게도 충격이 덜 하다. 쟤네 왜 저러니 정도의 반응이다. 벤슨의 살해는 첫 번째 살'인'이지만 살해가 목적이 아니라 두려움 속에서 자기방어의 행동에 의한 것으로 사고에 가깝게 느껴진다. 하지만 세번째 싸이먼의 살해는 충격적이다. 광란의 엑스터시 상태였지만 초록빛 야광봉 하나로 싸이먼을 괴물로 지목하여 떼로 창질을 하는 모습은 매우 잔인하게 느껴진다. 특히 '괴물'이라는 실체없는 위협의 진실을 알아낸 싸이먼이 한 마디 말은 커녕 반응숏 하나 없이 창질 후에 시체로 남겨지는 장면은 영화의 하이라이트로 손꼽힐만하다. 네번째 피기의 살해는 갈데까지 간 아이들이 폭력에 무감각해진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나이 어린 아이들에 의해 저질러졌다는 것이 가장 충격적이다. 

마지막 씬은 랄프와 그를 쫓는 잭 무리간의 추격씬이다. 잭 무리는 랄프를 잡기 위해 온 섬에 불을 지르고 토끼몰이 하듯 그를 쫓는다. 질주하던 랄프는 숲을 벗어나 해변의 모래사장으로 넘어지듯 튕겨나간다. 그의 눈 앞에 서 있는 쌩뚱맞은 군인 하나. 너희들 여기서 뭐하니. 순간 랄프는 막 악몽에서 깨어난 아이처럼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껴 운다. 간발의 차이로 랄프의 발치에 도착한 잭과 아이들은 랄프 너머로 보이는 헬기와 군인들을 바라보며 멍하니 서있다. 이들의 표정은 선생님 앞에 불려나와 혼날까 두려워하는 학생의 표정이다. 그 불안한 눈망울이 소름돋도록 순진하다. 

4.
원작을 읽지 않았지만 영화만으로 볼 때 제목 <파리대왕>이 가리키는 것은 아마 잭인 듯 하다. 영화에서 파리가 등장하는 곳은 한 장소 뿐인데 바로 괴물의 동굴 앞이다. 그곳에 괴물이 있다고 선언한 잭은 사냥한 돼지의 머리를 따서 창에 꽂아 세워둔다. 괴물에게 주는 선물이라며. 그 썩은 돼지 머리에 파리떼가 시커멓게 꼬인다. 그러므로 파리대왕이란 호칭은 '괴물'이라는 가상의 위협을 통해 공포와 불안을 통치의 도구로 삼은 폭군 잭을 비꼬는 이름이다. 

안타깝게도 한국에는 너무나 질기고 오래된, 또 앞으로도 쉽게 사라질 것 같지 않은 거대한 괴물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괴물을 이용하는 파리대왕들은 너무나 많다. 반면에 이 땅의 싸이먼들 늘상 죽임을 당하고 있다. 싸이먼들이 많아지고 피기들이 더 많이 살아남는다면 한번쯤 노예가 아닌 상태로 살아볼 수 있겠지. 그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올해 본 영화 중에 가장 유쾌하고 아름다운 팝콘 무비였다. 스펙타클도 이 정도로 밀어부치면 예술의 경지에 올랐다고 해야하나. 유쾌하게 보고 즐기면서 스트레스 푸는 용도로 최고! <아바타> 보면서 실망한 3D 의 가능성을 재발견했다. 초반 드래곤들과의 액션씬은 어지럽고 정신사나웠지만 용타고 하늘을 나는 드라이브 장면과 마지막 왕용과의 공중대결 씬은 정말 너무너무아름다웠다. 드림웍스 만세! 하지만 개인적으로 아직 3D 는 보고나면 눈도 좀 아프고 답답하다.







룸메이트와 공과금을 쉐어하는 남자. n분의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