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릎팍 도사에서 아마존의 눈물 제작진들이 나온 걸 보고는
마음이 동해 아마존의 눈물을 차례로 보고 있는 중이다.
프롤로그, 1부, 2부, 3부, 에필로그로 회차가 나눠져 있는 것 같은데
2부 <사라지는 낙원>편을 보면서는 진도가 나가질 않는다.
절제의 고삐를 풀어헤쳐버린, 그래서 우리 모두와 우리의 터전까지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고가고 있는 미친 망아지의 등에 올라탄 현대의 도시문명에게
서서히 숨통이 조여지고 있는 부족들을 보는 것이 너무나 괴롭고 먹먹하기 때문이다.

비담 김남길이 읊는 나레이션에서는
'원시'와 '문명'이라는 단어로 각각의 문명을 지칭하고 있는데
이는 아마존 인디오들의 삶의 양식을 문명이라고 부를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러나 내게 나레이션을 쓰라고 했다면
(욕망에 대해) '절제'하는 문명과 '폭주'하는 문명으로 각각을 지칭했을 것이다.
 



티비에서 하길래 다시 봤다.
보면서 눈에 밟히는 단점들을 짚어본다.

1.
장도리 씬에서 어깨들의 어설픈 액션은 옥의 티다.
부러진 각목들을 오대수가 아니라 벽에다 집어던진다든가
연장을 휘둘러 벽에 붙은 소화전을 꽝 소리나게 내리치는 모습은
프로레슬링을 떠올리게 한다. 펀치를 하는 동시에 발을 구르는 것마냥.
감독은 편집실에서 얼마나 속이 쓰렸을까.
필시 촬영 때 원하는 만큼 테이크를 못 갔을 것이다.
어려운 롱테이크.

2.
펜트하우스에서 미쳐날뛰는 오대수와 실랑이를 벌이다
귀를 뚫린 한실장은 그만하라는 유지태의 말을 듣지못해
머리에 총알이 박힌다. 이 때 유지태는 자기 얼굴에 튄
한실장의 피를 닦다가 하얀 와이셔츠 소매 자락을 신경질적으로
살펴보는데...이 장면이 영화 전체에서 제일 싫었다.
'냉혹한 사이코패스'의 클리쉐라 할 만한 이 진부한 설정은
단지 스타일에 머문다. 이 후에 오대수가 바짓가랑이를 부여잡고
난리 부르스를 칠 때 유지태는 한 번도 자기 옷에 신경쓰지 않았다.

3.
한때는 너무나 매력적이었던 만화적인 점프컷.
헤어진 애인을 다시 보는 기분.


#.
성형전의 강혜정 얼굴은 너무 섹시하다.




1.
'걸어도 걸어도'를 다시 보았다. 처음 봤을 때는 보고도 제대로 보지 못했던 부분들이
새롭게 눈에 들었다.

소년(난 참 이름에 관심이 없다)은 아버지가 없다. 새아빠는 이름을 부를 뿐 아빠라는
호칭은 쓰지 않는다. 소년이 죽음을 대하는 방식이 새아빠와의 대화에서 처음 드러난다.
새아빠=료짱은 소년에게 묻는다. 학교에서 토끼가 죽었는데 웃었다고 하더라, 왜 그랬니?
소년은 친구가 모두 토끼에게 편지를 쓰자고 하는게 웃겼다고 대답한다. 읽을 사람이
없는데 왜 쓰냐는 거다. 소년에게 죽음은 그냥 사라지는 것, 없어지는 것이었다.

소년은 료짱의 아버지, 즉 의붓 할아버지의 진찰실을 구경하다가 할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
게 된다. 꿈이 뭐냐는 질문에 피아노 조율사가 될 거라고 답한다. 이유를 묻는 할아버지에게
음악 선생님이 좋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소년에게 할아버지는 의사도 좋은 직업이라고 은근히
세뇌교육을 시작한다. 하지만 우리는 영화의 끝 부분에서 소년이 음악 선생님을 팔아 둘러댄
이유가 거짓말이었음을 알게 된다. 소년이 피아노 조율사가 되고 싶은 이유는 그것이 죽은
아버지의 직업이었기 때문이고 이는 자신의 직업(의사)을 물려받지 않는 아들에 대한 섭섭함을
지닌 할아버지의 마음에 은은하게 전달된다. 

아버지와 같은 일을 하는 것이 아버지를 사랑하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지만 소년에게는
아버지와 같은 일을 하는 것이 아버지를 아버지로 받아들이는 통로가 된다. 죽은 아버지는
없어지거나 사라지는 게 아니라 소년의 안에 있다. 료짱도 서서히 소년에게 들어갈 것이라는 
엄마의 말을 듣고 소년은 달밤에 마당에 나가 독백한다. 

피아노 조율사가 되고 싶다. 그게 안 된다면 의사가 되고 싶다. 

할아버지의 세뇌교육이 결실을 맺는 순간이다.

2.
'영화구조의 미학'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분리병치, 점진노출을 위한 자잘한 컷 구성에 혹했다가
이 영화를 보고는 다시 본래 취향으로 회귀했다. 내게 가장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점은 같은 앵글을
반복적으로 사용하면서 관객에게 공간을 익숙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는 실제 공간 중 촬영에 적합한
최소한만을 카메라에 노출시키면서 입체적이고 효율적으로 영화 속 세계를 구축하는 방법이다.
두 번째 사랑스러운 점은 주변부의 움직임을 포착해서 버리지 않는 넓은 아량의 숏들이다. 바로
다음과 같은 장면들이 그러한 예이다.
료짱과 그의 부인이 역전 식당에서 대화하는 장면. 그들 뒷편의
식당 창문 너머로 역전의 바쁜 움직임이 보여진다.

엄마, 료짱, 부인, 소년이 성묘를 하고 내리막길에
들어서면 저 멀리 후경에 기차가 등장하여 가로로 길게 움직인다.

료짱과 아버지가 일, 결혼 문제로 
날카롭게 대치하는 거실 장면 후경에는 철없는 매형과 조카들이 난리법석을 떨고 있다.

이런 장면들은 영화에 생명을 불어넣는 영화 본연의 매력 포인트 되겠다.

3.
극장에서 봤을 때는 여자들이 료짱의 어릴적 사진과 의사가 되겠다는 일기 같은 걸 보는
장면이 있었는데 이번에 다시 본 버전에는 그 부분이 빠져있었다. DVD를 체크해봐야겠다.
 

District 9



보는 내내 으악(징그러워서), 오오(우월한씨쥐에) 거렸다. <블레이드 러너>이래로 야심찬 SF들은 줄곧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타자를 강박적으로 등장시킨다는 혐의를 포착했다. 그런데 데커드들과는 달리 <디스트릭트9>의 외계인이 가진 인간성은 그다지 감동적이지 않았다. 잘 녹여내지 못했다. 후편을 암시하는 노골적인 요소들(정말 3년 후에 올까?)도 섭섭하게 느껴졌지만 압도적인 화면과 매력적인 설정들이 많은 단점들을 커버한다. "다룰 수 없는 무기-DNA-오염당한 육체-파멸/도망-예기치 않게 얻은 힘" 요런건 정말 익숙하면서도 효과적인 스토리 라인인듯 하다.    
118. '제리'란 이름과 독일군과의 관계.

129. 빌리는 못 생긴 발렌시아와 결혼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그가 앓고 있는 병의 여러 증상 가운데 하나였다.

131. 외계에서 온 방문자의 새 복음서.

135. 빌리는 흔들의자에서 내려와 욕실로 가서 오줌을 누었다. 관중들은 열광했다.

156. 그것은 그녀에게 아주 재미있는 일이었다. 사랑의 이름으로 그의 존엄성을 앗아가는 일이.
커트 보네거트의 제 5도살장을 읽고 있다. 주인공 빌리가 막 포로로 잡혀 포로 수송 열차에 태워졌다. 열차가 출발하기도 전에 각 화차에서는 죽은 포로들이 발생해서 주변 포로들이 독일 경비병에게 알려주고 있다. 그런 요청으로 경비병들이 들것을 들고 오른 한 열차는 포로가 7명 밖에 없었다. 대령들만 모아 놓은 화차였던 것이다.
여기서 궁금한 점이 생겼다. 포로들을 왜 계급별로 분류하는가. 적군이지만 군인으로서의 예우인가. 아니면 그들이 포로로서 더 유용한 정보를 많이 가지고 있는 가치있는 포로들이기 때문일까.
웃긴 것은 빌리의 옆에 탄 부랑자 출신의 한 미군병사는 이 정도면 그리 나쁜 상황은 아니야, 때때론 난 이것보다 더 비참했다 고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포로로 잡혀도 대령으로서의 예우를 받는 사람들과 전쟁 포로만도 못한 상황을 살아온 사람들 사이의 간격이 돋보인다.

+
뒤에 보니 저 부랑자 열차가 수용소 도착하기 전에 죽는다. 그가 남긴 최후의 말은 이랬다. "이게 심하다고 생각하나? 이 정도면 나쁘지 않아."
티비에서 하는 <식스 센스>를 봤다. 개봉할 때 극장에서 보고 처음인데 다시 보는 게 즐거운 영화였다. 드라마를 참 잘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면서 <유주얼 서스펙트>가 올라서 있던 단상으로 훌쩍 뛰어올라 함께 서게 된 이 뒤통수치는 영화의 미덕들에 대해 다시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보면서 마지막의 이 자동차 속 씬을 보고는 감탄을 금할 수 없었는데, 역시나 유튜브에 My favorit scene from"The Sixth Sense"란 제목으로 칼질되어 올라와 있었다. 사람은 다 비슷!

 
제 5도살장

"그렇게 가는 거지(So it goes)"


1.
네, 우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있네요.

2.
수용소에서 나와 맞닥뜨리게 되는 아수라장의 도시 이미지를 어떻게 표현했을까 두근거리며 봤는데 밋밋하고 무난하고 영 재미없었다. 그리고 툭하면 허옇고 거뭇하고...백색증이고, 눈 멀었다고 컨셉 그렇게 잡을 거면 뭐하러 영화로 만들었을까. 그냥 라디오 드라마 하지.
 



바다 같은 영화다. 많은 걸 품고 있다.

이동진의 리뷰를 보다가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들이 '남겨진 사람들'을 다루고 있다는 말에 무릎을 탁 쳤다. 남편을 사별한 <환상의 빛>의 여주인공과 <걸어도...>의 여주인공(?)을 설피 엮어서 <걸어도..>가 <환상..>의 후일담 중 일부 같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는데, 이게 실은 감독의 전작을 꿰뚫는 굵은 주제의 한 파편이었던 것이다.   

아들을 죽게 한 젊은이를 제사 때마다 불러 고통스럽게 만드는 정도는 당연히 해줘야 한다는 어머니의 섬뜩한 얼굴에 우리는 이 영화의 방점이 찍혀있음을 안다. 어머니는 뜨개질을 하면서 스모선수의 이름을 기억해내려 우스꽝스런 표정을 잔뜩 지은 바로 직후에 저 섬뜩한 말을 내뱉는다. 어머니의 옆 얼굴 숏에서 조명은 의도적으로 그녀의 얼굴에 그림자를 잔뜩 묻혀놨다. 조명과 직전의 우스꽝스런 분위기가 섬뜩함을 배가시킨다. 

기타노 다케시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그딴거 누구 보는 사람만 없으면 어디 갖다 버리고 싶다고..." 그게 '가족' 이다. 어쩔 수 없고 어쩔 수 없고 또 어쩔 수 없는 것들로 짓뭉개져 이제 도려내는 수밖에 거기서 벗어날 길은 없다. 그러니 섭섭해 하지 마세요, 섭섭해 하지 말게나. 이 말 밖엔 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