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으로 폴 토마스 앤더슨의 장편은 모두 본 듯하다. 몇 개 안되니 참 고마우면서도 아쉽다. 그래도 꾹꾹 눌러담은 밥 한그릇 마냥 보고 나면 마음이 꽉 차는 영화들뿐이로고.

아마 이것이 그의 첫 장편? 원제가 Hard Eight 인데 추측컨데 주사위 두개를 던져 4땡으로 8이 되는 것을 Hard Eight 이라 부르는 것 같다. 제목만 보고 타짜들간의 암투 혹은 미스터 앤더슨식의 타짜 인생 관조하기 쯤으로 생각했는데 여기서 타짜는 전혀 중요한 게 아니었었던 것이었다.

존(존c.라일리)은 빈털터리. 까페 문앞에 널부러져 있는데 시드니(필립 베이커 홀)가 그를 불러세운다. 시드니는 존에게 돈을 빌려주고 라스베가스에 데려가 도박장 시스템의 빈틈을 기묘하게 이용하여 존이 기반을 마련할 수 있게 도와준다. 이때 영화는 훌쩍 2년을 건너 뛴다. 이제 존은 시드니를 스승처럼 아버지처럼 대한다(그리고 여기서 기네스 펠트로의 엉덩이와 늘씬한 각선미가 은근하지만 강력하게 관객의 몰입을 강요한다). 존은 시드니와 같은 술을 마시고 같은 옷을 입는다. 존에게는 지미(사무엘L.잭슨)라는 친구가 있는데 도박장 기도다. 그리고 기네스 펠트로는 그 도박장의 2차나가는 아가씨 클레멘타인. 시드니는 클레멘타인을 가여이여겨 돌봐주는데 그 와중에 존과 클레멘타인은 눈이 맞는다. 사실 존이 예전부터 그녀를 짝사랑해온터였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되는데 말 튼지 하루만에 결혼해버린 존과 클레멘타인은 그날 오후 다급하게 시드니에게 도움을 청하는 전화를 하게 된다. 클레멘타인이 화대를 못 받아 양아치아저씨와 실랑이를 하던 중 얻어맞고 존을 불러들인다. 둘은 양아치를 감금하고 그의 부인에게 몸값조로 화대를 요구한다. 시드니가 찾아가 둘을 진정시키고 사건을 수습한다. 존과 클레멘타인을 나이아가라 폭포로 피신시킨 시드니는 존의 친구 지미의 쪽지를 받게 된다. 지미는 시드니의 비밀을 알고 있다며 그를 협박한다. 시드니가 사실은 존 아버지의 살해범이란 걸 안다며 만달러를 요구한다. 시드니는 6천달러밖에 없다며 돈을 건넨다(6천달러는 처음 시드니가 존을 만났을 때 존이 어머니 장례식 비용이 필요하다며 요구한 액수다). 이후 돌아오고 있다는 존의 안부전화를 받은 시드니는 존에게 사랑한다고 너를 자식처럼 아낀다고 말한 뒤 지미의 집에 숨어들어가 지미가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아가씨를 품에 안고 들어오는 지미를 쏴죽인후 빼앗긴 돈을 되찾는다. 그리곤 처음 존을 만났던 까페로 가 커피를 마시며 와이셔츠 소매자락에 묻은 핏자국을 코트소매로 덮으며 영화는 끝난다.

복기하는 의미에서 줄거리를 길게 써봤는데 짧게 말하자면, 늙은 도박꾼이 자기가 죽인 남자의 아들을 돌보는 이야기이다. 막연하게 다르덴 형제의 <아들>이 떠올랐다. 물론 거기선 아들을 죽인 소년을 돌보는(?) 아버지 이야기니 뭔가 유사한 느낌이 없진 않다. <아들>이 용서'하는'것에 대한 영화라면 이 영화는 용서를 '구하는' 것에 대한 영화랄까.

시드니는 존이 자신의 비밀을 아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것은 자기 잘못을 덮기 위해서가 아니라 존의 안녕을 위해서다. 그것은 시드니가 지미에게 가진 돈을 모두 빼앗긴 후 존의 전화를 받는 순간 드러난다. 시드니는 지미와의 협상과정에서 돈을 포기한 대가로 자기 목숨과 존의 안녕을 택한다. 존의 안녕이란 시드니가 자기 아버지의 살해범이란 사실을 계속 모르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고 자신이 그의 곁을 떠나는 것이다. 하지만 존과 통화하는 동안 시드니는 그가 존을 진심으로 아끼고 있음을 깨닫고 존의 곁에 머물것임을 선언한다. 그리고 어쩌면 비밀을 고백할 각오까지 했을지 모른다. 실제로 시드니는 그 통화에서 고백의 늬앙스를 한껏 풍긴다. 결국 시드니는 지미를 해치움으로써 존과 그 사이의 장애물을 원천적으로 제거한다. 이제 둘 사이의 문제는 온전히 시드니의 판단에 따라 좌지우지 될 상황에 놓였는데 그것은 비밀을 고백하느냐 마느냐 하는 선택의 기로이다. 하지만 마지막 장면에서 시드니는 하얀소매의 붉은 핏자국을 코트소매를 스윽 덮어버림으로서 자신의 비밀을 그 핏자국처럼 쉽게 드러내지 않을 것임을 결심한다. 존은 여전히 그를 아버지처럼 존경할 것이고 고뇌와 용서를 구하는 마음은 온전히 시드니의 몫으로 남을 것이다.


-필립 세이무어 호프만

보니까 토마스 앤더슨도 자주 작업하는 배우들이 있는 것 같다. 존 역의 존C.라일리도 그런 것 같고, 중간에 단역으로 나왔던 필립 세이무어 호프만도 그런 케이스. 특히 <펀치 드렁크 러브>에서 인상적인 악역을 보여줬던 필립 세이무어 호프만은 여기서 예의 그 될성부른 떡잎을 보여줬다고 해야하나...아무튼 굉장히 돋보이는 단역을 연기했다. 시드니가 존과 클레멘타인의 구조요청을 받기 바로 직전 씬에서 호프만과 도박장에서 마주친다. 호프만은 매우 시건방지고 깐죽대는 캐릭터를 맡았는데 <펀치...>에서의 악역의 젊은 시절쯤 되는 캐릭터다. 시드니를 늙은이라 비웃으며 연신 낄낄거리는데 이는 시드니를 도발하고 왕년의 막나가는 도박꾼 시드니의 면모를 슬쩍 드러내는 동기를 부여한다. 또 동시에 이 씬은 시드니가 본격적으로 곤경에 빠지기 시작하는 전조를 보여줌으로써 매우 효과적으로 기능한다. 인상적인 캐릭터와 씬.





눈먼 자들의 도시눈먼 자들의 도시 - 8점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해냄
갑자기 전염병처럼 세상 모든 사람의 눈이 먼다는 것은 판타지 혹은 SF적인 설정이다. 그러나 거개의 판타지나 SF작품들이 실은 '바로 이 순간'의 현실 위에 오롯이 서 있듯이 이 작품 역시 동류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것은 끔직한 동화이며 인간과 문명에 대한 작가의 사고실험 보고서가 된다.

작품은 크게 세 파트로 나눌 수 있다.
1. 눈이 멀기 시작하는 최초의 사람들
2. 정신병동에 격리수용되는 눈먼자들
3. 아수라장이 돼버린 도시에서 살아남는 눈먼자들

가장 인상깊게 읽은 부분은 2번 파트인데 <파리대왕>이나 <15소년표류기> 같은 표류문학(?)의 뼈대를 잇고 있는 듯 하다. 감금된 눈먼자들의 외부에는 이들을 철저히 통제하는 동시에 그들을 '백색공포(눈이 머는 것)' 자체로 여기며 두려워하는 군인들이 있고, 내부에는 눈먼자들 사이에 발생하는 갈등과 권력다툼이 발생하고 이를 통해 작가는 약탈과 폭력으로 얼룩진 인간 군상을 그려내고 있다.

이 눈먼자들의 수용소 이야기를 읽으며 계속 떠오르는 글이 있었으니 바로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에 소개된 '역학관계'란 글이다.

"쥐들을 상대로 하나의 실험이 행해졌다. 낭시대학 행동 생물학 연구소의 디디에 드조르라는 연구자가 쥐들의 수영능력을 할아보기 위한 실험을 했다. 그는 쥐 여섯마리를 한 우리 한에 넣었다. 그 우리의 문은 하나뿐인데, 수영장으로 통하게 되어 있어서 쥐들은 그 수영장을 건너야만 먹이를 나누어 주는 사료통에 도달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그 실험에서 가장 먼저 확인된 것은, 먹이를 구하러 가기 위해 여섯마리의 쥐가 다 헤엄을 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쥐들 사이에 역할 분담이 이루어졌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이 나타났다. 즉, 헤엄을 치고 먹이를 빼앗기는 쥐가 두 마리, 헤엄을 치지않고 먹이를 빼앗는 쥐가 두 마리, 헤엄을 치고 먹이를 빼앗기거나 빼앗지 않는 독립적인 쥐가 한 마리, 헤엄도 못 치고 먹이도 빼앗지 못하는 천덕꾸러기 쥐가 한 마리였다. 먹이를 빼앗기는 두 쥐는 물속으로 헤엄을 쳐서 먹이를 구하러 갔다. 그 쥐들이 우리 안으로 들어오자, 먹이를 빼앗는 두 쥐가 그 쥐들을 때리고 머리를 물 속에 쳐박았다. 결국 애써 먹이를 가져온 두 쥐는 자기들의 먹이를 내놓고 말았다. 두 착취자가 배불리 먹고 난 다음 굴복한 두 피착취자는 비로소 자기들의 크로켓을 먹을 수 있었다. 착취자들은 헤엄을 치는 일이 없었다. 그쥐들은 헤엄치는 쥐들을 때려서 먹이를 빼앗기만 하면되었다. 독립적인 쥐는 아주 힘이 세기 때문에 착취자들에게 굴복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천덕꾸러기 쥐는 헤엄을 칠줄도 모르고, 헤엄치는 쥐들에게 겁을 줄 수도 없었기 때문에, 다른 쥐들이 싸울때 떨어진 부스러기를 주워먹었다.
이번에는 스무개의 우리를 만들어 똑같은 실험을 했다. 스무개의 우리에서 역시 똑같은 구조, 즉 피착취자 두 마리,착취자 두 마리,독립적인 쥐 한마리,천덕꾸러기 쥐 한마리가 나타났다. 그러한 위계구조가 형성되는 과정을 좀더 정확히 알기 위해, 이번에는 착취자 여섯마리를 함께 우리에 넣어 보았다. 그 쥐들은 밤새 싸웠다. 다음날 아침이 되자, 그 쥐들 가운데 두마리가 식사당번이 되었고,한마리는 혼자 헤엄을 쳤으며,나머지 한마리는 어쩔수 없이 모든것을 참아내고 있었다. 착취자들에게 굴복했던 쥐들을 가지고도 똑같은 실험을 해보았다. 다음날 새벽이 되자, 그 쥐들 가운데 두 마리가 왕초 노릇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실험에서 우리가 정작 음미해 보아야 할 대목은, 쥐들의 뇌를 연구하기 위해서 두개골을 열어 보았을 때, 가장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쥐는 바로 착취자들이었다는 사실이다. 착취자들은 피착취자들이 복종하지 않게 될까봐 전전긍긍했음에 틀림없다..."

쥐같은 인간들.

상상의 힘은 꼭 섬세함과 함께여야한다. 소설을 읽다보면 눈먼자들의 도시를 괴롭히는 가장 큰 요소중의 하나가 배설물이다. 똥과 오줌이 젖과 꿀처럼 흐르는 에덴의 도시. 그 도시에 사는 인간들은 왜 갑자기 눈이 멀었을까. 두려움? 내가 읽기로는 어떤 두려움 때문이었다. 병실에 모여 사람들이 자기 처음 눈이 멀었을 때 마지막으로 본 것을 이야기하는 게임을 한다. 그 말미에 두려움이 실명의 원인이 될 수 있다고 말한 색안경을 쓴 여자의 말에 누군가 "그거야말로 진리로군, 그것보다 참된 말은 있을 수 없어, 우리는 눈이 머는 순간 이미 눈이 멀어 있었소, 두려움 때문에 눈이 먼 거지, 그리고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계속 눈이 멀어 있을 것이고." 라고 덧붙인다. 아마 이 두려움은 풍요로우나 자유롭지 못한 우리들의 상태를 설명하는 감정일 것이다. 평생을 필요없는 필요를 추구하기 위해 노새처럼 일하고 맹목적인 경쟁에 파묻혀서 어깨를 걸고 나아가야 할 동료들의 뒤통수를 치며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 안에는 바로 이 두려움이 있다.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것들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그 망상적 두려움을 계속 유지시키려는 시스템. 아마 작가는 <눈먼자들의 도시>를 통해 이 진실을 덮고 있는 두꺼운 백색 장막을 벗겨놓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마지막 두 문장. "두려움 때문에 그녀는 눈길을 얼른 아래로 돌렸다. 도시는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http://narog.tistory.com2009-03-02T08:11:410.3810

찰스 로튼, 1955

1.
로버트 미첨이 연기한 해리의 캐릭터가 상당히 인상적이다. 선교사로 위장한 결혼사기강도쯤 되는데 저 위장이 허투루 껍데기만 뒤집어 쓴 그런 위장이 아니라 뼛속까지 자기는 선교사인데 그 방향이 좀 삐뚤어진 인간. 그래서 남들이 볼 때는 절대 선교사일 수 없는 그런 종류의 위장이다. 위험한 인간의 대표주자(우리 각하 생각나더라;;). 근데 또 섹스는 오로지 출산 목적 이외에는 허용치 않는 인간이라 의외로 여자들에게 쉽게 어필한다. '저인 딴 남자들과 좀 달라~'류의 환상을 심어주는 것이지. 게다가 풍채좋고 미남이다(이건 각하랑 완전 다름!!).

2.
줄거리는 대충 이렇다. 어린 남매의 아버지가 큰 돈을 훔치고 집에 온다. 허겁지겁 돈을 숨기고 아이들에게 비밀을 지킬것과 아들에게 동생을 보살필 것을 맹세시킨후 곧 들이닥친 경찰에 잡혀 감옥에 간다. 감옥에서 아이들의 아버지는 해리를 만나고 해리는 남매의 아버지가 큰 돈을 숨겨놨음을 알게된다. 출옥한 해리는 두 남매의 어머니 윌라를 꼬셔서 결혼하고 돈을 찾기 위해 아이들을 다그친다. 그 와중에 윌라에게 자신의 정체를 발각당한 해리는 윌라를 살해하고 강바닥에 차와 함께 그녀를 처박는다.
아이들은 작은 보트를 타고 어머니가 잠든 강을 따라 하류로 하류로 구걸을 하고 노숙을 하며 떠내려간다. 해리는 말을 타고 육로로 이들을 쫓는다. 강 하류의 어느 기슭에서 부모없는 아이들을 맡아 키우는 아줌마(Lillian Gish)를 만나 그녀의 집에 정착한다. 
해리는 이 아줌마가 맡아 키우는 아이들 중 가장 큰 소녀를 꼬드겨 남매가 있는 곳을 확인하고 집으로 쳐들어 온다. 하지만 용감한 아줌마는 장총으로 응사한다. 총에 맞은 해리는 헛간에 숨지만 신고를 받고 달려온 경찰에 체포되고, 남매의 오빠는 아버지가 잡혀가는 기시감 때문인지 해리의 곁에 주저 앉아 울부짖는다. 

3.
이야기를 끌고 가는 가장 큰 힘은 물론 쫓기는 아이들과 쫓는 악한이 만들어 내는 스릴. 그리고 해리 캐릭터가 주는 기괴함과 독특함. 해리를 좋아하는 어린 동생의 순진한 마음과 그것을 막아 아버지의 비밀을 지키려는 오빠 소년의 의지가 또 다른 축으로 이야기를 끌고 간다.

4.
전체적인 미술이나 세트에서 풍기는 분위기는 독일표현주의. 콘트라스트 강하고 천정 높고 사선의 건물라인. 추가로 이 영화에서 꼭 언급하고 넘어가야하는 부분은 남매가 강을 따라 도망치는 시퀀스에서 드러나는 동화적이고 몽환적인 장면들이다. 강기슭에 커다란 두꺼비가 이들을 지켜보고 밝고 둥근 달빛에 반짝이는 꽃가루가 흩날리는 강물 위를 미끄러지듯 유영하는 작은 배위의 남루한 남매는 동화 속에서 바로 튀어나온 듯한 묘한 느낌을 준다. 그리고 이 시퀀스가 긴장감을 잠시 유예시키며 또 이 모든 상황이 악몽이었으면 좋겠다는 소년의 마음을 헤아리게 만든다.

 


갑자기 전염병처럼 세상 모든 사람의 눈이 먼다는 것은 판타지 혹은 SF적인 설정이다. 그러나 거개의 판타지나 SF작품들이 실은 '바로 이 순간'의 현실 위에 오롯이 서 있듯이 이 작품 역시 동류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것은 끔직한 동화이며 인간과 문명에 대한 작가의 사고실험 보고서가 된다.

작품은 크게 세 파트로 나눌 수 있다.
1. 눈이 멀기 시작하는 최초의 사람들
2. 정신병동에 격리수용되는 눈먼자들
3. 아수라장이 돼버린 도시에서 살아남는 눈먼자들

가장 인상깊게 읽은 부분은 2번 파트인데 <파리대왕>이나 <15소년표류기> 같은 표류문학(?)의 뼈대를 잇고 있는 듯 하다. 감금된 눈먼자들의 외부에는 이들을 철저히 통제하는 동시에 그들을 '백색공포(눈이 머는 것)' 자체로 여기며 두려워하는 군인들이 있고, 내부에는 눈먼자들 사이에 발생하는 갈등과 권력다툼이 발생하고 이를 통해 작가는 약탈과 폭력으로 얼룩진 인간 군상을 그려내고 있다.
 
이 눈먼자들의 수용소 이야기를 읽으며 계속 떠오르는 글이 있었으니 바로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에 소개된 '역학관계'란 글이다.

쥐들을 상대로 하나의 실험이 행해졌다. 낭시대학 행동 생물학 연구소의 디디에 드조르라는 연구자가 쥐들의 수영능력을 할아보기 위한 실험을 했다. 그는 쥐 여섯마리를 한 우리 한에 넣었다. 그 우리의 문은 하나뿐인데, 수영장으로 통하게 되어 있어서 쥐들은 그 수영장을 건너야만 먹이를 나누어 주는 사료통에 도달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그 실험에서 가장 먼저 확인된 것은, 먹이를 구하러 가기 위해 여섯마리의 쥐가 다 헤엄을 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쥐들 사이에 역할 분담이 이루어졌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이 나타났다. 즉, 헤엄을 치고 먹이를 빼앗기는 쥐가 두 마리, 헤엄을 치지않고 먹이를 빼앗는 쥐가 두 마리, 헤엄을 치고 먹이를 빼앗기거나 빼앗지 않는 독립적인 쥐가 한 마리, 헤엄도 못 치고 먹이도 빼앗지 못하는 천덕꾸러기 쥐가 한 마리였다. 먹이를 빼앗기는 두 쥐는 물속으로 헤엄을 쳐서 먹이를 구하러 갔다. 그 쥐들이 우리 안으로 들어오자, 먹이를 빼앗는 두 쥐가 그 쥐들을 때리고 머리를 물 속에 쳐박았다. 결국 애써 먹이를 가져온 두 쥐는 자기들의 먹이를 내놓고 말았다. 두 착취자가 배불리 먹고 난 다음 굴복한 두 피착취자는 비로소 자기들의 크로켓을 먹을 수 있었다. 착취자들은 헤엄을 치는 일이 없었다. 그쥐들은 헤엄치는 쥐들을 때려서 먹이를 빼앗기만 하면되었다. 독립적인 쥐는 아주 힘이 세기 때문에 착취자들에게 굴복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천덕꾸러기 쥐는 헤엄을 칠줄도 모르고, 헤엄치는 쥐들에게 겁을 줄 수도 없었기 때문에, 다른 쥐들이 싸울때 떨어진 부스러기를 주워먹었다.

이번에는 스무개의 우리를 만들어 똑같은 실험을 했다. 스무개의 우리에서 역시 똑같은 구조,
즉 피착취자 두 마리,착취자 두 마리,독립적인 쥐 한마리,천덕꾸러기 쥐 한마리가 나타났다. 그러한 위계구조가 형성되는 과정을 좀더 정확히 알기 위해, 이번에는 착취자 여섯마리를 함께 우리에 넣어 보았다. 그 쥐들은 밤새 싸웠다. 다음날 아침이 되자, 그 쥐들 가운데 두마리가 식사당번이 되었고,한마리는 혼자 헤엄을 쳤으며,나머지 한마리는 어쩔수 없이 모든것을 참아내고 있었다. 착취자들에게 굴복했던 쥐들을 가지고도 똑같은 실험을 해보았다. 다음날 새벽이 되자, 그 쥐들 가운데 두 마리가 왕초 노릇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실험에서 우리가 정작 음미해 보아야 할 대목은,
쥐들의 뇌를 연구하기 위해서 두개골을 열어 보았을 때, 가장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쥐는 바로 착취자들이었다는 사실이다. 착취자들은 피착취자들이 복종하지 않게 될까봐 전전긍긍했음에 틀림없다...
 
쥐같은 인간들.

상상의 힘은 꼭 섬세함과 함께여야한다. 소설을 읽다보면 눈먼자들의 도시를 괴롭히는 가장 큰 요소중의 하나가 배설물이다. 똥과 오줌이 젖과 꿀처럼 흐르는 에덴의 도시. 그 도시에 사는 인간들은 왜 갑자기 눈이 멀었을까. 두려움? 내가 읽기로는 어떤 두려움 때문이었다. 병실에 모여 사람들이 자기 처음 눈이 멀었을 때 마지막으로 본 것을 이야기하는 게임을 한다. 그 말미에 두려움이 실명의 원인이 될 수 있다고 말한 색안경을 쓴 여자의 말에 누군가 "그거야말로 진리로군, 그것보다 참된 말은 있을 수 없어, 우리는 눈이 머는 순간 이미 눈이 멀어 있었소, 두려움 때문에 눈이 먼 거지, 그리고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계속 눈이 멀어 있을 것이고." 라고 덧붙인다.

아마 이 두려움은 풍요로우나 자유롭지 못한 우리들의 상태를 설명하는 감정일 것이다. 평생을 필요없는 필요를 추구하기 위해 노새처럼 일하고 맹목적인 경쟁에 파묻혀서 어깨를 걸고 나아가야 할 동료들의 뒤통수를 치며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 안에는 바로 이 두려움이 있다.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것들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그 망상적 두려움을 계속 유지시키려는 시스템. 아마 작가는 <눈먼자들의 도시>를 통해 이 진실을 덮고 있는 두꺼운 백색 장막을 벗겨놓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마지막 두 문장.
"두려움 때문에 그녀는 눈길을 얼른 아래로 돌렸다. 도시는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이 노래가 제일 좋았다.
저 여배우 왠지 매력적이다.

Everything's Alright. 앤드류 로이드 웨버.


후반부에 가자 이 책과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이 닮아 있음을 깨달았다. 오오...중남미문학의 뿌리가 여기에 있는 것인가...뭐 <백년..>말고는 아는 게 없어 잘 모르겠다만 닮긴 닮았어. 집안 대대로 물려받는 저주라던가, 집안의 단단한 기둥으로서의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의 존재 같은 건 말이지. 또 관능적인 육체에 대한 묘사와 섹스, 환상에 기댄 인물들. 오스카 와오는 노골적이고 현대적으로 SF와 판타지, 게임 등에 미쳐있지.

전혀 일면식도 없었던 도미니카 근대사와 마주쳐서 의외로 즐거웠다. 작년엔 문학을 일부러 멀리했는데 올해는 좀 친하게 지내볼 요량이다. 이정도면 좋은 출발.  

영화보기

1.
네이버에서 이런 영화도 보여주는구나.
그 명성자자하던 김동원 감독님의 <상계동 올림픽>.
부끄럽게도 이제사 처음으로 본다.

요즘 분노 게이지만 너무 증폭돼서 좀 걱정이다.


2.
'법'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법'은 그 자체로 완전하지 않다.

안식일에 벽돌벽이 무너져 그 아래 깔린 사람을 보고도 '법'을 지키기 위해 그를 구하는 '일'을 거부하는 사람들에 분노했던 예수.

사람죽게 해놓고 이제 불법시위하지 말라는 자들은 예수한테 졸라리 쳐맞을 놈들인것이다.


3.
시청인지 구청인지 직원들이, 아니면 용역깡패인지도 모를 놈들한테 내팽겨쳐지는 어머니를 구하려 나섰다가 집단구타당한 고등학생 아들이 먼지바닥에 뒹구르며 찢어진 옷 사이로 몸부림친다.
'억울해~억울해' 목놓아 우는데 눈물이 안나곤 못 배기겠더라.

하지만 정작 화면속의 사람들은 울지 않았다. 

그 먼지구덩이에서 들려오는 한 아주머니의 위로가 귀에 박힌다.


"그만울어, 하루 이틀 당한 일도 아니잖아. "

 

나는 한번도 당해본 적 없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보기만 하는데,
그것도 잘먹고 잘살다 어쩌다 한번씩 보는 장면이라
이렇게 눈물이 난다.

하지만
저 아줌마의 대사 앞에선 내 눈물은
그냥 평범한 소금물이 되어 어색하게 말라버린다.


4.
요새 그냥 맘이 너무 그러해서 뭐라도 하지 않으면 못 견딜 것 같아서
작지만 이런 거라도 해야겠다 싶다.

용산 철거민 문제 대책위원회 후원계좌
농협 067-02-302163  예금주 이종회

 동참하자.


이충렬, 2008

1.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호평에 어리둥절하다. 이 영화가 다큐멘터리로서 성취하기 힘든 부분을 잘 취하고도 가장 기본적인 부분에서 큰 실수를 범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다큐를 제작할 때는 대상과 카메라(제작자) 사이의 관계 맺기가 굉장히 중요하다. 워낭소리는 실제 영화에 반영된 기간은 1년이지만 촬영은 3년을 했다는 점에서도 드러나듯이 이 점을 간과하지 않고 많은 노력을 기울인 듯 보인다. 이는 결과물로도 증명되는데 두 어르신과 심지어 소 마저도 카메라 앞에서 편안하다. 트레일러에서도 강조하듯이 할머니의 촌철살인 대사들과 그분들이 마음을 열지 않았더라면 카메라에 담을 수 없었을 장면들도 많이 찍을 수 있었던 것 같다. 게다가 소의 임종의 순간까지도 영화에 담겨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시종 어깨에 힘이 들어간 연출로 보는 이를 힘들게 한다. 아름다운 화면, 미장센에의 과욕이 인간과 소 사이의 진정성을 흐리게 만들고 감동을 강요하는 음악의 삽입은 역효과를 일으키며 울화를 삽입한다. 

최종 편집의 과정에서 어떤 고민들이 있었을까. 

대단히 독창적인 소재를 취하고도 그 소재 자체가 주는 진정성 이상은 성취하지 못한, 혹은 포기해버린듯 하여 매우 안타까웠다.   

2.
그나저나 난 최원균 할아버지가 나오실 때마다 이 배우가 떠올랐다.

소림축구, 쿵푸허슬의 진국곤!! 닮았다고 본다.


조 사코는 저널리스트다.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을 읽고 팔레스타인의 현실을 제대로 알고자 하는 마음이 생겼다고 하는...
보통의 저널리스트들은 카메라나 펜을 든다. 물론 사코도 카메라와 펜을 들기는 든다. 하지만 저널의 최종 결과물이 사진이나 기사인 보통의 저널리스트들과는 다르게 사코는 만화를 통해 자신의 취재 결과를 대중들에게 선보인다.
결과는 대성공. 사코는 『팔레스타인』으로 1996년 미국도서출판 대상과 후에 보스니아 내전을 소재로 한 『안전지대: 고라즈드Safe Area:Gorazde』로 2001년 만화 부문 아이스너 상을 수상했다. 사코는 만화라는 매체로 저널리즘의 새로운 가능성을 연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이 책은 사코가 팔레스타인의 현실을 최대한 정확히 알려고 현지인들을 취재하는 목적의 여행을 주요 뼈대로 한다. 사코는 그 와중에 직접 소요사건을 겪기도 하고 취재를 위해 이스라엘에서 금하는 일들을 하면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제법 가까이서 보고 듣고 느낀다. 하지만 그는 미국에서 태어난 미국인으로서의 자신과 그들과의 관계에 대해 늘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취재는 어쩔 수 없이 그들이 늘 겪는 참상을 곧이곧대로 전할 수 없으며, 사코 자신은 그들의 고통을 온전히 공감할 수도 없다. 또 이 취재가 어떤 식으로 혹은 어떤 영향력을 가지고 세계인들에게 팔레스타인의 현실을 알릴 수 있는지 의문스러워하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명쾌한 답도 줄 수 없다. 이 관계에서 오는 감정들을 사코는 하나도 버리지 않는다. 그냥 이들을 외면하고 안전하고 안락한 자신의 보금자리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자신과 맞지 않는 혹은 동의할 수 없는 전통이나 정치적 노선 등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고 빈정거린다. 약자라해서 그들의 모든 행동들을 옹호하지 않는다. 

 또 이 책은 당연히도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에 대한 많은 정보를 담고 있다. 너무 멀고 복잡한 문제라 생각해서 굳이 알아서 파헤쳐보지 않은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새롭게 알게 되는 내용이 많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알면 알수록 이스라엘에 대한 분노가 스멀스멀 올라오게 될 것이다. 물론 이 책은 꽤 균형적인 시각을 갖추고 있다. 이스라엘의 관점과 입장도 많이 제공한다. 하지만 역사적 맥락과 실상을 알게되면 지금의 팔-이 문제는 시온주의자들의 생떼거리와 서구 제국주의 열강의 이해관계에 의해 시작됐단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스라엘이 하는 꼬라지를 보면 팔레스타인과의 공존을 원치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완전히 씨를 말려 없애버리려는듯 하다. 일제 식민치하의 조선 상황보다 훨씬 더 악랄하고 잔인한 행동들을 일삼는다. 이스라엘 군인들의 조준 사격은 아이들이라고 예외로 하지 않는다. 이스라엘 정착민들은 팔레스타인 마을에 처들어가 사람들을 구타하고 건물을 부수기를 밥먹듯 한다. 그들이 저항하면 총을 쏜다. 그래도 제대로 처벌받지 않는다. 이스라엘 정부는 이런 정착민들의 활동을 활성화 할 수 있도록 국각적인 지원을 펼친다. 팔레스타인 인들은 일하고 싶어도 일할 수 없고 철거 10분전에야 자기 집이 이유도 없이 헐린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저녁 8시 이후엔 통금이고 성질 더러운 군인들을 만나면 따귀를 맞거나 구두발에 차여도 반항할 수 없다.

이스라엘이 영국의 승인하에 팔레스타인들을 몰아내고 지금의 땅에 몰려와 나라를 세운 근거는 다음과 같은 구약의 하느님 말씀들에 있다.
 
내가 모세에게 말한 대로, 너희 발바닥이 닿는 곳은 어디든지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 광야에서부터 레바논까지, 큰 강인 유프라테스 강에서부터 헷 사람의 땅을 지나... 

여호수아 1장 3절     
  


내가 새롭게 알게 된 큰 틀들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1. 이스라엘은 성경 말씀을 근거로 지금의 땅을 자기들 것이라 우기고 혹은 믿고 있다.
2. 팔레스타인은 하나의 주권국가가 아니라 실질적으론 이스라엘의 통치를 받고 있다.
3.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모든 활동(경제적, 정치적, 사회적)은 이스라엘의 통제하에 있다.
4. 한마디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점령지의 어떤 전쟁포로들보다도 더 심각한 인권유린의 상황에 놓여있다.
5. 그럼에도 이스라엘은 계속 팔레스타인 거주 지역으로 자신들의 정착민들을 이주시켜 그들의 삶의 터전을 빼앗고 용역 깡패들이 철거민들을 괴롭히는 것보다 몇 배 더 심한, 하지만 본질은 똑같은 그런 활동을 조장한다. 



이런 상황에서 로켓 공격 핑계로 가자지구 침공한 이스라엘 바퀴벌레 새끼들은 나치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한 놈들은 절대 아니다.

 


이 책의 부제는 '인류 역사상 가장 뛰어난 천재들의 노트'다. 벌써 냄새가 나지 않는가. 천재가 되고 싶은자 혹은 그들 천재성의 비밀을 조금이라도 알고자 하는자 이 책을 사라!

하지만 난 학교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다. 아직 학생 신분인 동생을 이용했다. 유용한 놈 크하하. 결론부터 말하자면 빌려 읽기 참 잘했다. 전체적인 구성이 산만하고 내용도 책의 제목과 부제를 통해 떡밥을 던져놓은 것만큼 매력적이진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책을 읽은 후에 난 저자가 권한대로 나의 노트를 만들어 꾸준히 그것을 채워나가기로 결심했다. 왜냐면 사실 책을 읽기 전부터 비슷한 시도를 하고 있었고 그 일환으로 몸에 지니고 다닐 수 있는 크기의 수첩도 이미 데리고 있었다. 아마 그렇기 때문에 내가 더 혹했던 것이리라. 결국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얻고자 한 것은 그 노트의 운용 방법과 천재들의 구체적인 사례들이었다.

인터넷과 디지털 기기의 시대에 노트는 구시대적이다. 하지만 노트의 유용함은 그 구시대적 특징에 있다.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에 오히려 편리한 정보수집 틀은 함정이 된다. 오늘날 인터넷 시대의 많은 사람들이 정보취합의 도구로 이용하는 블로그와 비교하여 노트 쓰기의 유용함은 다음과 같은 효과를 선물해 준다. 

몰두, 용이한 접근성, 직접적인 느낌.

사실 블로그에 뭘 정리하려다가는 삼천포로 빠지기 쉽다. 이메일 확인, 꼬리에 꼬리를 무는 포털 찌라시 등등의 멀티 태스킹의 유혹이 도처에 널려있다. 하지만 노트는 지금 쓰고 있는 그것에만 몰두 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한다.

요즘 누구나 노트북을 들고 다닌다고 하지만 노트북은 '전원 스위치를 켜고 운영체제가 부팅되기를 기다리고 파일을 열어 코멘트를 해야'하는 번거러움을 피할 수 없다. 하지만 노트는 갑자기 떠오른 중요한 생각을 곧장 기록할 수 있다.

또 자료를 붙여서 뚱뚱해지고 손글씨로 가득찬 때묻은 노트는 그 자체로 생각이 자라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게 해준다. 


사실 시나리오 강의나 일러스트레이션 강의를 모두 들어본 나로서는 이 노트 쓰기가 낯설지 않다. '저널'이라고 불렸던 아이디어 노트 작성의 필요성을 두 수업 모두에서 들었기 때문이다. 무릇 작가라하면 장르에 상관없이 자신의 노트에 평소 떠오르는 생각들을 기록해두고 그것을 취합하여 작품을 구상하는 것이 일반적이라는 얘기다. 

이 영감어린 노트쓰기는 애완동물을 기르거나 작은 화분을 가꾸는 것과 비슷하다. 아니 그보다 더 고차원적인 '양육'의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노트라는 물질에 내 '영감과 생각'이라는 양분을 줌으로서 그것이 하나의 유기체로 진화되는 과정을 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노트는 주제별로 하나씩 정리하는 것이 좋다고 한다. 일단 잡다한 생각들을 마구잡이로 기록한 뒤 그것을 정리해서 다시 기록하거나 아니면 프린트해서 노트에 다시 붙이는 과정을 반복한다. 이렇게 구성된 노트의 물질성은 노트가 없었더라면 금방 흩날려버렸을 생각의 끈을 쉽게 놓치지 않게 해 줄 것이다.
 
이 책의 떡밥이었던 천재들의 노트는 그닥 특별하거나 실제로 내가 노트를 작성하는 데 유용한 팁을 제공해주지는 않는다. 각자 자신에게 맞는 운용방식이 있으니 너도 니가 알아서 만들라는 교훈을 줄 뿐이다. 게다가 마지막 챕터에서는 엉뚱하게 '다중 지능' 이야기를 주제로 썰을 푼다. 아마도 천재에 대해 새로운 시각에서 접근하려는 시도였다고 보인다. 하지만 이런 산만한 구성은  '노트쓰기'와 '천재'라는 커다란 두 주제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모습으로 비춰진다. 그럴리는 없겠지만 분량을 채우려고 억지로 껴맞춘 챕터라는 인상까지 받았다. 

마지막에 악평을 했지만 사실 하루만에 재미있게 읽었다. 관심있는 사람들은 '빌려서' 읽어봐도 좋을 듯하다. 끝으로 책에서 다룬 천재들 목록을 옮긴다.

아이작 뉴턴, 레오나르도 다 빈치, 마이클 패러데이, 알렉산드르 알렉산드로비치 류비세프,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정약용, 엔리코 페르미, 벤자민 프랭클린, 임마뉴엘 칸트, 앙리 포앙카레, 헤겔.

중간에 파인만과 도스토예프스키도 잠깐씩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