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따위 다시는 하지마!!!"

송신도 할머니는 터프하다. 역사의 발톱에 긁혀버린 그녀의 삶은 강해지는 쪽을 택했다. 그리고 사람을 쉽게 믿지 못한다. 그런 할머니가 긴 시간 자신과 같은 편에 서 준 사람들과 함께 일본을 상대로 소송을 한다. 패배 후 잠깐이지만 강한 할머니도 눈물을 흘린다.

난 이 영화를 보면서 웃기게도 법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분명히 요즘 우리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법과 관련된 이러저러한 사건들 탓일것이다.

일본은 할머니의 항소를 기각하면서 일본의 범죄행위는 인정하지만 공소시효가 지났다?든가 뭐 그런 식의 이유를 댔던 거 같다. 사실 일본까지 갈 것도 없이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일일이 열거할 필요도 없지. 삼성x파일과 관련된 노회찬, 촛불시위와 관련된 수많은 사건의 판결들, 유독 진보정당에만 엄격한 선거법 등도 다 일맥상통. 쎈놈들이 자기들 멋대로 이것저것 하는게 좀 민망하니까 법이라는 명분을 세워서 그 뒤에 쏙 숨는 거지.

그런데도 멍청하게 무조건 법!법!법! 지켜야 한다고 으악거리는 순진하지만 멍청한 사람들 보면 답답하다. 프랑스 유학파 공군 장교 김동ㄱ 후배의 말에 의하면 프랑스의 일반적인 법감정은 '왠지 어겨야할 대상' 이라능. 뭐, 무조건 개기라는 건 아니지만 법과 상식, 혹은 정의가 충돌할 때 무엇을 지지할 것인가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새파란 젊은 사람들이 체제 수호에 왜이렇게 목메는지 모르겠다.

뭐 길게 말해서 뭣하랴. 사진 한장으로 밀도있게 요약정리 된다!




이것으로 폴 토마스 앤더슨의 장편은 모두 본 듯하다. 몇 개 안되니 참 고마우면서도 아쉽다. 그래도 꾹꾹 눌러담은 밥 한그릇 마냥 보고 나면 마음이 꽉 차는 영화들뿐이로고.

아마 이것이 그의 첫 장편? 원제가 Hard Eight 인데 추측컨데 주사위 두개를 던져 4땡으로 8이 되는 것을 Hard Eight 이라 부르는 것 같다. 제목만 보고 타짜들간의 암투 혹은 미스터 앤더슨식의 타짜 인생 관조하기 쯤으로 생각했는데 여기서 타짜는 전혀 중요한 게 아니었었던 것이었다.

존(존c.라일리)은 빈털터리. 까페 문앞에 널부러져 있는데 시드니(필립 베이커 홀)가 그를 불러세운다. 시드니는 존에게 돈을 빌려주고 라스베가스에 데려가 도박장 시스템의 빈틈을 기묘하게 이용하여 존이 기반을 마련할 수 있게 도와준다. 이때 영화는 훌쩍 2년을 건너 뛴다. 이제 존은 시드니를 스승처럼 아버지처럼 대한다(그리고 여기서 기네스 펠트로의 엉덩이와 늘씬한 각선미가 은근하지만 강력하게 관객의 몰입을 강요한다). 존은 시드니와 같은 술을 마시고 같은 옷을 입는다. 존에게는 지미(사무엘L.잭슨)라는 친구가 있는데 도박장 기도다. 그리고 기네스 펠트로는 그 도박장의 2차나가는 아가씨 클레멘타인. 시드니는 클레멘타인을 가여이여겨 돌봐주는데 그 와중에 존과 클레멘타인은 눈이 맞는다. 사실 존이 예전부터 그녀를 짝사랑해온터였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되는데 말 튼지 하루만에 결혼해버린 존과 클레멘타인은 그날 오후 다급하게 시드니에게 도움을 청하는 전화를 하게 된다. 클레멘타인이 화대를 못 받아 양아치아저씨와 실랑이를 하던 중 얻어맞고 존을 불러들인다. 둘은 양아치를 감금하고 그의 부인에게 몸값조로 화대를 요구한다. 시드니가 찾아가 둘을 진정시키고 사건을 수습한다. 존과 클레멘타인을 나이아가라 폭포로 피신시킨 시드니는 존의 친구 지미의 쪽지를 받게 된다. 지미는 시드니의 비밀을 알고 있다며 그를 협박한다. 시드니가 사실은 존 아버지의 살해범이란 걸 안다며 만달러를 요구한다. 시드니는 6천달러밖에 없다며 돈을 건넨다(6천달러는 처음 시드니가 존을 만났을 때 존이 어머니 장례식 비용이 필요하다며 요구한 액수다). 이후 돌아오고 있다는 존의 안부전화를 받은 시드니는 존에게 사랑한다고 너를 자식처럼 아낀다고 말한 뒤 지미의 집에 숨어들어가 지미가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아가씨를 품에 안고 들어오는 지미를 쏴죽인후 빼앗긴 돈을 되찾는다. 그리곤 처음 존을 만났던 까페로 가 커피를 마시며 와이셔츠 소매자락에 묻은 핏자국을 코트소매로 덮으며 영화는 끝난다.

복기하는 의미에서 줄거리를 길게 써봤는데 짧게 말하자면, 늙은 도박꾼이 자기가 죽인 남자의 아들을 돌보는 이야기이다. 막연하게 다르덴 형제의 <아들>이 떠올랐다. 물론 거기선 아들을 죽인 소년을 돌보는(?) 아버지 이야기니 뭔가 유사한 느낌이 없진 않다. <아들>이 용서'하는'것에 대한 영화라면 이 영화는 용서를 '구하는' 것에 대한 영화랄까.

시드니는 존이 자신의 비밀을 아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것은 자기 잘못을 덮기 위해서가 아니라 존의 안녕을 위해서다. 그것은 시드니가 지미에게 가진 돈을 모두 빼앗긴 후 존의 전화를 받는 순간 드러난다. 시드니는 지미와의 협상과정에서 돈을 포기한 대가로 자기 목숨과 존의 안녕을 택한다. 존의 안녕이란 시드니가 자기 아버지의 살해범이란 사실을 계속 모르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고 자신이 그의 곁을 떠나는 것이다. 하지만 존과 통화하는 동안 시드니는 그가 존을 진심으로 아끼고 있음을 깨닫고 존의 곁에 머물것임을 선언한다. 그리고 어쩌면 비밀을 고백할 각오까지 했을지 모른다. 실제로 시드니는 그 통화에서 고백의 늬앙스를 한껏 풍긴다. 결국 시드니는 지미를 해치움으로써 존과 그 사이의 장애물을 원천적으로 제거한다. 이제 둘 사이의 문제는 온전히 시드니의 판단에 따라 좌지우지 될 상황에 놓였는데 그것은 비밀을 고백하느냐 마느냐 하는 선택의 기로이다. 하지만 마지막 장면에서 시드니는 하얀소매의 붉은 핏자국을 코트소매를 스윽 덮어버림으로서 자신의 비밀을 그 핏자국처럼 쉽게 드러내지 않을 것임을 결심한다. 존은 여전히 그를 아버지처럼 존경할 것이고 고뇌와 용서를 구하는 마음은 온전히 시드니의 몫으로 남을 것이다.


-필립 세이무어 호프만

보니까 토마스 앤더슨도 자주 작업하는 배우들이 있는 것 같다. 존 역의 존C.라일리도 그런 것 같고, 중간에 단역으로 나왔던 필립 세이무어 호프만도 그런 케이스. 특히 <펀치 드렁크 러브>에서 인상적인 악역을 보여줬던 필립 세이무어 호프만은 여기서 예의 그 될성부른 떡잎을 보여줬다고 해야하나...아무튼 굉장히 돋보이는 단역을 연기했다. 시드니가 존과 클레멘타인의 구조요청을 받기 바로 직전 씬에서 호프만과 도박장에서 마주친다. 호프만은 매우 시건방지고 깐죽대는 캐릭터를 맡았는데 <펀치...>에서의 악역의 젊은 시절쯤 되는 캐릭터다. 시드니를 늙은이라 비웃으며 연신 낄낄거리는데 이는 시드니를 도발하고 왕년의 막나가는 도박꾼 시드니의 면모를 슬쩍 드러내는 동기를 부여한다. 또 동시에 이 씬은 시드니가 본격적으로 곤경에 빠지기 시작하는 전조를 보여줌으로써 매우 효과적으로 기능한다. 인상적인 캐릭터와 씬.





눈먼 자들의 도시눈먼 자들의 도시 - 8점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해냄
갑자기 전염병처럼 세상 모든 사람의 눈이 먼다는 것은 판타지 혹은 SF적인 설정이다. 그러나 거개의 판타지나 SF작품들이 실은 '바로 이 순간'의 현실 위에 오롯이 서 있듯이 이 작품 역시 동류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것은 끔직한 동화이며 인간과 문명에 대한 작가의 사고실험 보고서가 된다.

작품은 크게 세 파트로 나눌 수 있다.
1. 눈이 멀기 시작하는 최초의 사람들
2. 정신병동에 격리수용되는 눈먼자들
3. 아수라장이 돼버린 도시에서 살아남는 눈먼자들

가장 인상깊게 읽은 부분은 2번 파트인데 <파리대왕>이나 <15소년표류기> 같은 표류문학(?)의 뼈대를 잇고 있는 듯 하다. 감금된 눈먼자들의 외부에는 이들을 철저히 통제하는 동시에 그들을 '백색공포(눈이 머는 것)' 자체로 여기며 두려워하는 군인들이 있고, 내부에는 눈먼자들 사이에 발생하는 갈등과 권력다툼이 발생하고 이를 통해 작가는 약탈과 폭력으로 얼룩진 인간 군상을 그려내고 있다.

이 눈먼자들의 수용소 이야기를 읽으며 계속 떠오르는 글이 있었으니 바로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에 소개된 '역학관계'란 글이다.

"쥐들을 상대로 하나의 실험이 행해졌다. 낭시대학 행동 생물학 연구소의 디디에 드조르라는 연구자가 쥐들의 수영능력을 할아보기 위한 실험을 했다. 그는 쥐 여섯마리를 한 우리 한에 넣었다. 그 우리의 문은 하나뿐인데, 수영장으로 통하게 되어 있어서 쥐들은 그 수영장을 건너야만 먹이를 나누어 주는 사료통에 도달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그 실험에서 가장 먼저 확인된 것은, 먹이를 구하러 가기 위해 여섯마리의 쥐가 다 헤엄을 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쥐들 사이에 역할 분담이 이루어졌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이 나타났다. 즉, 헤엄을 치고 먹이를 빼앗기는 쥐가 두 마리, 헤엄을 치지않고 먹이를 빼앗는 쥐가 두 마리, 헤엄을 치고 먹이를 빼앗기거나 빼앗지 않는 독립적인 쥐가 한 마리, 헤엄도 못 치고 먹이도 빼앗지 못하는 천덕꾸러기 쥐가 한 마리였다. 먹이를 빼앗기는 두 쥐는 물속으로 헤엄을 쳐서 먹이를 구하러 갔다. 그 쥐들이 우리 안으로 들어오자, 먹이를 빼앗는 두 쥐가 그 쥐들을 때리고 머리를 물 속에 쳐박았다. 결국 애써 먹이를 가져온 두 쥐는 자기들의 먹이를 내놓고 말았다. 두 착취자가 배불리 먹고 난 다음 굴복한 두 피착취자는 비로소 자기들의 크로켓을 먹을 수 있었다. 착취자들은 헤엄을 치는 일이 없었다. 그쥐들은 헤엄치는 쥐들을 때려서 먹이를 빼앗기만 하면되었다. 독립적인 쥐는 아주 힘이 세기 때문에 착취자들에게 굴복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천덕꾸러기 쥐는 헤엄을 칠줄도 모르고, 헤엄치는 쥐들에게 겁을 줄 수도 없었기 때문에, 다른 쥐들이 싸울때 떨어진 부스러기를 주워먹었다.
이번에는 스무개의 우리를 만들어 똑같은 실험을 했다. 스무개의 우리에서 역시 똑같은 구조, 즉 피착취자 두 마리,착취자 두 마리,독립적인 쥐 한마리,천덕꾸러기 쥐 한마리가 나타났다. 그러한 위계구조가 형성되는 과정을 좀더 정확히 알기 위해, 이번에는 착취자 여섯마리를 함께 우리에 넣어 보았다. 그 쥐들은 밤새 싸웠다. 다음날 아침이 되자, 그 쥐들 가운데 두마리가 식사당번이 되었고,한마리는 혼자 헤엄을 쳤으며,나머지 한마리는 어쩔수 없이 모든것을 참아내고 있었다. 착취자들에게 굴복했던 쥐들을 가지고도 똑같은 실험을 해보았다. 다음날 새벽이 되자, 그 쥐들 가운데 두 마리가 왕초 노릇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실험에서 우리가 정작 음미해 보아야 할 대목은, 쥐들의 뇌를 연구하기 위해서 두개골을 열어 보았을 때, 가장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쥐는 바로 착취자들이었다는 사실이다. 착취자들은 피착취자들이 복종하지 않게 될까봐 전전긍긍했음에 틀림없다..."

쥐같은 인간들.

상상의 힘은 꼭 섬세함과 함께여야한다. 소설을 읽다보면 눈먼자들의 도시를 괴롭히는 가장 큰 요소중의 하나가 배설물이다. 똥과 오줌이 젖과 꿀처럼 흐르는 에덴의 도시. 그 도시에 사는 인간들은 왜 갑자기 눈이 멀었을까. 두려움? 내가 읽기로는 어떤 두려움 때문이었다. 병실에 모여 사람들이 자기 처음 눈이 멀었을 때 마지막으로 본 것을 이야기하는 게임을 한다. 그 말미에 두려움이 실명의 원인이 될 수 있다고 말한 색안경을 쓴 여자의 말에 누군가 "그거야말로 진리로군, 그것보다 참된 말은 있을 수 없어, 우리는 눈이 머는 순간 이미 눈이 멀어 있었소, 두려움 때문에 눈이 먼 거지, 그리고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계속 눈이 멀어 있을 것이고." 라고 덧붙인다. 아마 이 두려움은 풍요로우나 자유롭지 못한 우리들의 상태를 설명하는 감정일 것이다. 평생을 필요없는 필요를 추구하기 위해 노새처럼 일하고 맹목적인 경쟁에 파묻혀서 어깨를 걸고 나아가야 할 동료들의 뒤통수를 치며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 안에는 바로 이 두려움이 있다.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것들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그 망상적 두려움을 계속 유지시키려는 시스템. 아마 작가는 <눈먼자들의 도시>를 통해 이 진실을 덮고 있는 두꺼운 백색 장막을 벗겨놓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마지막 두 문장. "두려움 때문에 그녀는 눈길을 얼른 아래로 돌렸다. 도시는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http://narog.tistory.com2009-03-02T08:11:410.3810

찰스 로튼, 1955

1.
로버트 미첨이 연기한 해리의 캐릭터가 상당히 인상적이다. 선교사로 위장한 결혼사기강도쯤 되는데 저 위장이 허투루 껍데기만 뒤집어 쓴 그런 위장이 아니라 뼛속까지 자기는 선교사인데 그 방향이 좀 삐뚤어진 인간. 그래서 남들이 볼 때는 절대 선교사일 수 없는 그런 종류의 위장이다. 위험한 인간의 대표주자(우리 각하 생각나더라;;). 근데 또 섹스는 오로지 출산 목적 이외에는 허용치 않는 인간이라 의외로 여자들에게 쉽게 어필한다. '저인 딴 남자들과 좀 달라~'류의 환상을 심어주는 것이지. 게다가 풍채좋고 미남이다(이건 각하랑 완전 다름!!).

2.
줄거리는 대충 이렇다. 어린 남매의 아버지가 큰 돈을 훔치고 집에 온다. 허겁지겁 돈을 숨기고 아이들에게 비밀을 지킬것과 아들에게 동생을 보살필 것을 맹세시킨후 곧 들이닥친 경찰에 잡혀 감옥에 간다. 감옥에서 아이들의 아버지는 해리를 만나고 해리는 남매의 아버지가 큰 돈을 숨겨놨음을 알게된다. 출옥한 해리는 두 남매의 어머니 윌라를 꼬셔서 결혼하고 돈을 찾기 위해 아이들을 다그친다. 그 와중에 윌라에게 자신의 정체를 발각당한 해리는 윌라를 살해하고 강바닥에 차와 함께 그녀를 처박는다.
아이들은 작은 보트를 타고 어머니가 잠든 강을 따라 하류로 하류로 구걸을 하고 노숙을 하며 떠내려간다. 해리는 말을 타고 육로로 이들을 쫓는다. 강 하류의 어느 기슭에서 부모없는 아이들을 맡아 키우는 아줌마(Lillian Gish)를 만나 그녀의 집에 정착한다. 
해리는 이 아줌마가 맡아 키우는 아이들 중 가장 큰 소녀를 꼬드겨 남매가 있는 곳을 확인하고 집으로 쳐들어 온다. 하지만 용감한 아줌마는 장총으로 응사한다. 총에 맞은 해리는 헛간에 숨지만 신고를 받고 달려온 경찰에 체포되고, 남매의 오빠는 아버지가 잡혀가는 기시감 때문인지 해리의 곁에 주저 앉아 울부짖는다. 

3.
이야기를 끌고 가는 가장 큰 힘은 물론 쫓기는 아이들과 쫓는 악한이 만들어 내는 스릴. 그리고 해리 캐릭터가 주는 기괴함과 독특함. 해리를 좋아하는 어린 동생의 순진한 마음과 그것을 막아 아버지의 비밀을 지키려는 오빠 소년의 의지가 또 다른 축으로 이야기를 끌고 간다.

4.
전체적인 미술이나 세트에서 풍기는 분위기는 독일표현주의. 콘트라스트 강하고 천정 높고 사선의 건물라인. 추가로 이 영화에서 꼭 언급하고 넘어가야하는 부분은 남매가 강을 따라 도망치는 시퀀스에서 드러나는 동화적이고 몽환적인 장면들이다. 강기슭에 커다란 두꺼비가 이들을 지켜보고 밝고 둥근 달빛에 반짝이는 꽃가루가 흩날리는 강물 위를 미끄러지듯 유영하는 작은 배위의 남루한 남매는 동화 속에서 바로 튀어나온 듯한 묘한 느낌을 준다. 그리고 이 시퀀스가 긴장감을 잠시 유예시키며 또 이 모든 상황이 악몽이었으면 좋겠다는 소년의 마음을 헤아리게 만든다.

 


갑자기 전염병처럼 세상 모든 사람의 눈이 먼다는 것은 판타지 혹은 SF적인 설정이다. 그러나 거개의 판타지나 SF작품들이 실은 '바로 이 순간'의 현실 위에 오롯이 서 있듯이 이 작품 역시 동류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것은 끔직한 동화이며 인간과 문명에 대한 작가의 사고실험 보고서가 된다.

작품은 크게 세 파트로 나눌 수 있다.
1. 눈이 멀기 시작하는 최초의 사람들
2. 정신병동에 격리수용되는 눈먼자들
3. 아수라장이 돼버린 도시에서 살아남는 눈먼자들

가장 인상깊게 읽은 부분은 2번 파트인데 <파리대왕>이나 <15소년표류기> 같은 표류문학(?)의 뼈대를 잇고 있는 듯 하다. 감금된 눈먼자들의 외부에는 이들을 철저히 통제하는 동시에 그들을 '백색공포(눈이 머는 것)' 자체로 여기며 두려워하는 군인들이 있고, 내부에는 눈먼자들 사이에 발생하는 갈등과 권력다툼이 발생하고 이를 통해 작가는 약탈과 폭력으로 얼룩진 인간 군상을 그려내고 있다.
 
이 눈먼자들의 수용소 이야기를 읽으며 계속 떠오르는 글이 있었으니 바로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에 소개된 '역학관계'란 글이다.

쥐들을 상대로 하나의 실험이 행해졌다. 낭시대학 행동 생물학 연구소의 디디에 드조르라는 연구자가 쥐들의 수영능력을 할아보기 위한 실험을 했다. 그는 쥐 여섯마리를 한 우리 한에 넣었다. 그 우리의 문은 하나뿐인데, 수영장으로 통하게 되어 있어서 쥐들은 그 수영장을 건너야만 먹이를 나누어 주는 사료통에 도달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그 실험에서 가장 먼저 확인된 것은, 먹이를 구하러 가기 위해 여섯마리의 쥐가 다 헤엄을 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쥐들 사이에 역할 분담이 이루어졌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이 나타났다. 즉, 헤엄을 치고 먹이를 빼앗기는 쥐가 두 마리, 헤엄을 치지않고 먹이를 빼앗는 쥐가 두 마리, 헤엄을 치고 먹이를 빼앗기거나 빼앗지 않는 독립적인 쥐가 한 마리, 헤엄도 못 치고 먹이도 빼앗지 못하는 천덕꾸러기 쥐가 한 마리였다. 먹이를 빼앗기는 두 쥐는 물속으로 헤엄을 쳐서 먹이를 구하러 갔다. 그 쥐들이 우리 안으로 들어오자, 먹이를 빼앗는 두 쥐가 그 쥐들을 때리고 머리를 물 속에 쳐박았다. 결국 애써 먹이를 가져온 두 쥐는 자기들의 먹이를 내놓고 말았다. 두 착취자가 배불리 먹고 난 다음 굴복한 두 피착취자는 비로소 자기들의 크로켓을 먹을 수 있었다. 착취자들은 헤엄을 치는 일이 없었다. 그쥐들은 헤엄치는 쥐들을 때려서 먹이를 빼앗기만 하면되었다. 독립적인 쥐는 아주 힘이 세기 때문에 착취자들에게 굴복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천덕꾸러기 쥐는 헤엄을 칠줄도 모르고, 헤엄치는 쥐들에게 겁을 줄 수도 없었기 때문에, 다른 쥐들이 싸울때 떨어진 부스러기를 주워먹었다.

이번에는 스무개의 우리를 만들어 똑같은 실험을 했다. 스무개의 우리에서 역시 똑같은 구조,
즉 피착취자 두 마리,착취자 두 마리,독립적인 쥐 한마리,천덕꾸러기 쥐 한마리가 나타났다. 그러한 위계구조가 형성되는 과정을 좀더 정확히 알기 위해, 이번에는 착취자 여섯마리를 함께 우리에 넣어 보았다. 그 쥐들은 밤새 싸웠다. 다음날 아침이 되자, 그 쥐들 가운데 두마리가 식사당번이 되었고,한마리는 혼자 헤엄을 쳤으며,나머지 한마리는 어쩔수 없이 모든것을 참아내고 있었다. 착취자들에게 굴복했던 쥐들을 가지고도 똑같은 실험을 해보았다. 다음날 새벽이 되자, 그 쥐들 가운데 두 마리가 왕초 노릇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실험에서 우리가 정작 음미해 보아야 할 대목은,
쥐들의 뇌를 연구하기 위해서 두개골을 열어 보았을 때, 가장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쥐는 바로 착취자들이었다는 사실이다. 착취자들은 피착취자들이 복종하지 않게 될까봐 전전긍긍했음에 틀림없다...
 
쥐같은 인간들.

상상의 힘은 꼭 섬세함과 함께여야한다. 소설을 읽다보면 눈먼자들의 도시를 괴롭히는 가장 큰 요소중의 하나가 배설물이다. 똥과 오줌이 젖과 꿀처럼 흐르는 에덴의 도시. 그 도시에 사는 인간들은 왜 갑자기 눈이 멀었을까. 두려움? 내가 읽기로는 어떤 두려움 때문이었다. 병실에 모여 사람들이 자기 처음 눈이 멀었을 때 마지막으로 본 것을 이야기하는 게임을 한다. 그 말미에 두려움이 실명의 원인이 될 수 있다고 말한 색안경을 쓴 여자의 말에 누군가 "그거야말로 진리로군, 그것보다 참된 말은 있을 수 없어, 우리는 눈이 머는 순간 이미 눈이 멀어 있었소, 두려움 때문에 눈이 먼 거지, 그리고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계속 눈이 멀어 있을 것이고." 라고 덧붙인다.

아마 이 두려움은 풍요로우나 자유롭지 못한 우리들의 상태를 설명하는 감정일 것이다. 평생을 필요없는 필요를 추구하기 위해 노새처럼 일하고 맹목적인 경쟁에 파묻혀서 어깨를 걸고 나아가야 할 동료들의 뒤통수를 치며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 안에는 바로 이 두려움이 있다.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것들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그 망상적 두려움을 계속 유지시키려는 시스템. 아마 작가는 <눈먼자들의 도시>를 통해 이 진실을 덮고 있는 두꺼운 백색 장막을 벗겨놓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마지막 두 문장.
"두려움 때문에 그녀는 눈길을 얼른 아래로 돌렸다. 도시는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