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똥파리>, 양익준, 2008

부모 자식간에 아무 문제도 없는 집이 있을까. 나 역시 그 고민을 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좋은 해결책을 생각해 낼 수 있었던 적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문제는 쉽게 덮혀지고(해결은 아니다) 그 때마다 나름의 방법으로 사태에 대처하지만 그 대부분은 적당히 인내하거나 포기하거나 기만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대가는 애증으로 점철된 처절한 가족사다. 

'처절'이란 말을 정말로 써도 될까. 우리 집은 <똥파리>에 비하면 전혀 처절하지 않다. 그리고 굳이 <똥파리>까지 가지 않더라도 주변 누군가의 처절함은 이미 나의 것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러나 그 모든 더 심한 처절함들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있어서는 나의 가족사야말로 진짜 처절이고 처절의 전부다.

감각은 늘 우리를 희롱한다. 좁은 시야의 내 앞에선 내 고통이 효도르처럼 크고 무섭게 보이다가도 링위에 <똥파리>와 내 고통이 맞붙고 있는 걸 멀리서 보게 되면 내 고통은 오히려 고통이라 부르는게 무안할 정도의 풋내기라는 게 명확해진다. 하지만 그러다가도 다시 내 곁에 오면 효도르가 된다. 너 아까는 그렇게 작았던 주제에! 라고 아무리 외쳐봐야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맞는 것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 뭐가 잘못된건 없다. 그냥 고통이 내 것일 때와 내 것이 아닐 때란 원래 그런 것인갑다 할 뿐이다. 

다만, 난 이 핏줄 문제로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다. 내 고민의 무게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으로 영화를 만들고자 했을 때는 또 상황이 다르다. 보는 사람에게 말을 거는거니까. 어떻게 보일지. 이 고통이 객관적인 링 위에서 어느 정도의 체급으로 보이느냐에 대한 인식이 필요하다. 이런 고민에 같이 영화를 본 후배는 '쉽게 공감할 수 있는 보편성'이라는 장점에 무게를 실어주기도 했다. 하지만 좀 힘이 빠지는 것도 사실이다. 덜 불행해서 고민이라는 푸념이라니...배가 불렀다.



  


 
    

<천일야화>,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 1974

"하나의 꿈은 이야기 전체를 말하지 않지요. 진리는 여러개의 꿈 안에 존재해요."



야한것은 참 좋다. 물론 야한 영화를 보는 것은 실제로 야한 짓을 하는 것 보단 김빠지는 일이지만 상대적으로 안전하다는 장점이 있다. 야한 짓에는 많은 경우 위험이 따르고 어쩌면 그 위험과 야함은 불가분의 관계일 수도 있다. 위험과 야함이라니 파졸리니의 죽음이 연상된다(물론 조심스럽다, 나는 겉으로 드러난 사실조차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다). 그는 마르크스주의자였고 동성애자였다. 그는 로마 외곽의 오스티아 해변에서 죽임을 당했다. 장이 파열되고 얼굴은 짓이겨져 신원을 확인할 수 없을 정도로 폭행당한 상태였다. 놀랍게도 검색해보면 사진이 나온다. 차마 퍼올 순 없었다. <살로, 소돔..>에 출연했던 17세 소년 피노 펠로시의 단독 범행이라는 공식 발표가 있었지만 그의 가슴을 밟고 지나간 자동차 바퀴 자국 등 납득할 수 없는 문제들은 끝까지 풀리지 않았다. 다만 그에게는 적이 많았다는 점을 참고하자. 다시 한번 언급하자면 그는 마르크스주의자였고 동성애자였다.

천일야화는 엄청 야하다고 한다. 제대로 읽어본 적은 없다. 파졸리니는 그 천일밤의 이야기 중 열개를 골라 영화에 담았다. 원작을 제대로 모르니 둘을 비교할 수는 없다. 다만 영화에선 확실하게 파졸리니의 욕망이 드러난다는 점을 이야기 하고 싶었다. 마지막 씬에서 왕이 된 여성노예가 헤어졌던 주인 소년을 만나 자신의 정체를 고백하기 전에 그를 침대에 눕힌 후 엉덩이를 까보이게 하는 장면을 노골적인 파졸리니의 시선으로 느낀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그렇다면 혐의를 파졸리니에게 국한시키지 말고 모든 영화감독에게 확장시켜 생각해보자. 카메라가 감독의 시선이 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시비를 가릴 문제는 아니다. 그럴 능려도 없고 생각도 없다. 솔직하게 내 감상을 풀어놓는게 지금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인 것 같다. 소년의 엉덩이를 카메라가 정면으로 보여주는 순간 동성애자 파졸리니가 불쑥 솟아올랐다. 순간 나는 영화에서 소외됐고 파졸리니는 저 소년과 잤을지도 모르거나 최소한 자고 싶어할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흑인 여자의 탄력적인 몸을 보며 얼굴이 조금 더 갸름하게 생겼으면 완벽할 텐데란 생각을 하며 그녀와 자면 어떨까 상상하기 시작했다.



대니(리버 피닉스)는 두 살때부터 도망자였다. 그의 부모인 아서와 애니가 FBI 수배범으로 15년간 도망자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과격 반전운동원으로 네이팜탄 연구소를 폭파한 혐의로 쫓기고 있다. 당시 폭발로 의도하지 않았지만 연구소 경비원이 눈이 멀었다고 한다. 대니와 어린 동생 해리는 이런 부모 탓에 6개월마다 학교를 옮기고 머리 색을 바꾼다. 친구를 사귈 틈은 커녕 언제 집을 떠날 지도 알 수 없는 5분 대기조의 삶을 산다. 하지만 대니는 부모를 원망하거나 탓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고난은 가족을 똘똘 뭉치게 하고 정상(?)적인 가족 보다 훨씬 더 그들의 생활에 가족애와 활력을 넘치게 한다.

하지만 문제가 없을 수 없다. 아서는 어머니가 죽은 뒤 한달 후에야 그녀의 부고를 듣는다. 그것도 차를 바꿔주러온 조직원을 통해서 말이다. 대니는 학교를 옮기면서 지난 학교의 성적표를 제출하지 못한다. 애니는 학교 직원 앞에서 아들의 성적표를 잃어버렸다고 너스레를 떨어야 한다. 애니와 평범한 관계 이상의 분위기를 풍기는 옛 조직원은 은행을 털자며 아서와 애니를 찾아온다. 아서는 그가 가져온 총더미를 아이들에게 들이밀며 절대 총을 가까이 하지 말라고 소리친다. 그날 밤 그는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자신의 신상정보를 고래고래 떠벌리며 집에 들어온다.

대니는 애니의 재능을 물려받아 음악에 소질이 있다. 새로 전학간 학교의 음악 선생님은 그의 피아노 연주를 듣고 줄리아드 음대에 추천서를 써준다. 대니도 열정적이어서 도망자 생활을 하면서도 늘 모형 건반을 들고 다니며 연습을 한다. 줄리아드 음대에 실기 시험을 보고 사실상 합격을 통보받는다. 하지만 그가 대학에 가려면 아서와 애니, 해리와는 영영 볼 수 없게 된다. 여기서 이 영화의 주된 갈등이 발생한다.

영화를 보고 나서 떠오른 소설이 있다. 오쿠다 히데오의 <남쪽으로 튀어>가 그것인데, 이유는 인물 설정이나 주요 에피소드들이 너무 유사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가 20년은 먼저 나왔으니 아마 오쿠다 히데오가 소설을 쓰며 이 영화를 참고 했음에 틀림없다. 너무 재미있게 본 소설인데 집에 가서 책을 다시 뒤져봐야겠다. 이 영화에 대한 언급이 없다면 좀 실망할 정도 유사한 부분이 많다. <남쪽..>에서는 아버지가 전공투 출신의 아나키스트로 나오고 어머니 역시 운동권의 마돈나 쯤으로 나왔던 것 같다. 물론 소설 속 가족이 일상적으로 도망을 다니거나 하지는 않지만 어머니의 부모가 권세가 집안이라던가 (<허공..>에서도 애니의 부모도 부르주아 재력가로 나온다), 옛 조직후배가 찾아와 일을 저지르고 이들에게 약간의 피해를 입히는 점, 또 주인공 소년이 부모 몰래 외할머니를 만난다는 설정은 영화와 소설이 공유하는 부분이다. 

영화에서 가장 좋았던 장면은 애니의 생일파티에 대니가 로나를 초대해 즐겁게 케익을 자르고 음악에 맟춰 춤을 추는 장면이다. 요새 시드니 루멧의 영화들을 쭉 찾아보고 있는데 공통적으로 느끼는 바가 이야기가 재미있고 배우들이 너무나 돋보인다라는 점이다. 이 생일파티 장면에서도 공식적으로 정부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집안이지만 또 그래서 치뤄야하는 개인적인 문제들이 산재해있지만 그럼에도 이 '사람들'은 이 순간 얼마나 행복한지 느낄 수 있었다. 또 정반대의 환경에서 자라온 로나라는 소녀와 대니의 풋풋한 사랑은 이 가족의 짧지만 진한 행복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여배우가 내 스타일이 아니라 영화 내내 불만스러웠는데 이 장면에서 만큼은 여배우가 참 이뻐보였다. 

이상적인 공동체를 가족이라는 틀에서 보여줌으로서 그 한계와 희망을 동시에 제시하는 소설로서 <남쪽으로 튀어>를 참 좋아했는데 그 원조격인 영화를 만난 듯 해서 반가웠다. 이송 감독님 홈페이지에 보니 시드니 루멧을 '민주당스럽다'는 말로 표현해 놓은 걸 봤는데 난 민주당스러운게 뭔지 정확히 모르겠으나 내가 본 바에 의하면 그는 최소한 '정의로운 시스템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일면 보수적으로 보이는 면도 없지 않다. 물론 그의 영화가 형식적인 면에서 유난히 극영화적이고 내러티브가 강하기 때문에 영화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래디컬하게 고민하는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아마 이 점이 그를 보수적으로 보이게 하는 데 일조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솔직한 마음으로 이런 영화들에 환멸을 느껴 실험영화나 전위적인 영화에 천착할 만큼 난 장르영화, 극영화들들을 많이 보지 않았고 여전히 깊은 매력을 느낀다. 시드니 루멧은 숭고하진 않지만 농밀한 희노애락을 느끼게 해준다.   


덧. 
아이다호 이후 리버 피닉스의 두 번째 영환데 진짜 멋있다.
이제 곧 서른인데 저런 표정으로 사춘기 다시 보내고 싶다ㅆㅂ
근데 호아킨 피닉스는 정말 친동생 맞는감? 뭐가 달라도 너무 달라.
  
*잘 생긴 형을 둔 연기파 배우 호아킨 피닉스



       


  


러시모어 두상들 사이에서 아찔한 추격전을 벌이는데 보고 있는 내 다리가 휘청거렸다. 요새 몸이 허하긴 허한가보다. 또 어릴 때 주말의 명화로 이 영화 보면서 아부지가 자기 영화에 슬쩍슬쩍 등장하는 히치콕의 깜찍한 습성에 대해 설명해 주셨던 기억도 새록새록 났다.

어떻게 보면 이야기가 기름 잘 친 매끄러운 기계처럼 술술 풀리는 듯 보이기도 하는데 또 어찌보면 설렁설렁 버릴 건 버리고 핵심만 간단히 챙겨서 가는 것 같기도 하다. 숙련공이 어깨에 힘 빼고 먼산 보면서 툭 툭 끊어쳐서 만든 작품 같달까. 
음..히치콕은 을유문화사에서 나온 평전도 1,400쪽 정도 되는(트뤼포는 약 800쪽 정돈데) 영화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인데, 한마디로 거대한 물꼬를 텄지. 당연히 오늘날의 영화들에도 그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고 그래서 브레송처럼 '요런게 있네!'하는 발견의 감흥은 별로 없다. 그게 아쉽다면 아쉽달까. 비유하자면 교과서 같은 거다. 필히 봐야 되고 누구나 보긴 하는데 제일 좋아하는 책으로 꼽히지는 않는 느낌? 난 교과서 제일 재밌지 않았거든. 그래도 이 영화에 드러난 똘끼 충만한 장난스러움은 참 마음에 든다. 특히 마지막에 터널로 힘차게 삽입되는 기차 같은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