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쓰게 요시하루의 단편집이 도착했다. 
쓰게처럼 그릴 수 있었으면...ㅜㅜ
책 받고 삘받아서 좀 그려봤다.
순차적인 컷들은 아니고 랜덤하게 떠오르는데로 그림. 
최근에 만화를 그려보려고 머리를 싸매고 궁리를 해보니 영화와 유사한 점이 가장 많은 매체라는 것을 알았다. 영화와는 또 다른 면에서 만만치 않은 지점들이 무궁하지만 이쪽의 고통은 그래도 견뎌 볼 자신이 더 난다. 가장 좋은 점은 아이디어가 떠올랐을 때 사부작 사부작 앉은 자리에서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 또 그 결과물이 매체의 최종 완성 단계에 상당히 근접한 수준까지 가능하다는 점이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하나 있는데 이것으로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끝까지 완성해 보는 게 목표다. 사진은 그 이야기의 첫 장인데 그림체, 작업방식에 대해 고민하며 테스트해 본 제 1 버전이다. 검정 칠을 했더니 '만화' 같아 보인다는 것에 크게 고무됐다.   




귀부인과 승무원 swept away, 리나 베르트뮬러, 1974

 

계급적 적대감으로 서로를 미워했던 부르조아 귀부인과 선원은 무인도에서 표류하는 동안 문명의 틀에 포박당했던 스스로를 해방시키며 서로를 사랑하게 된다. 세상과의 단절을 통해 사랑을 얻은 그들이기에 갑작스런 구조선의 등장은 구원이 아니라 그들의 낙원을 파괴할 어두운 그림자였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이 바깥세상에서도 굳건할 것임을 증명하고 싶었던 선원은 구조선에 신호를 보내고, 섬 깊숙히 숨어 구조선을 피하고자 했던 귀부인의 얼굴엔 불안감이 스쳐지나간다. 

문명 세계로 돌아오자 귀부인의 남편은 헬기로 마중오고 선원의 부인은 버선발로 방파제를 뛰어와 안긴다. 선원은 귀부인에게 다시 섬으로 돌아가자고 속삭이지만 고개를 떨군 귀부인은 남편의 헬기와 함께 하늘로 떠오른다. 이륙하는 헬기를 향해 절규하는 선원의 외침.

인간의 자유의지란 얼마나 기만적인 개념인가. 우리 앞에 놓인 선택지들이란 결국 내가 속한 시스템에 의해 이리 걸러지고 다듬어진 것들뿐. 나라면 절대로 그 섬에서 안 나왔을거야.